프로그램 노트
관심 밖의 일들은 하나둘 잊힐 만큼 작업에 몰두한 80대의 예술가. 기억은 쇠해가고 있지만 한 올 한 올 그렸던 머리카락은 눈에 선하다. 여성 최초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이자, 한국 1세대 페미니즘 작가 윤석남의 이야기다. 마흔의 주부, “살기 위해” 붓을 든 그의 작품세계는 젊은 시절 남편을 여의고 여섯 남매를 홀로 키워낸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이어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남성들을 뒷바라지해 온 자신으로 회귀하며, 한국 사회의 수많은 여성으로 나아간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주제만큼이나 표현 매체 또한 유화, 드로잉, 조각, 설치, 채색화 등 경계를 넘나든다. 그의 작품 생애를 따라가며 교차하는 작업 장면과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업이 곧 삶이 되는 작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덕목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힘이라 그는 말한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야.” 여성으로서,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 아닐까. 작업이라는 게 점점 더 재밌어진다는, 그래서 오래 살고 싶다는 그의 붓질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