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ast+ 윤영미가 만난 여성 혁신가 3
화가 윤석남_페미니즘 미술의 산증인을 만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품었던 화가라는 꿈을 마흔이 되어서야 꺼내게 된 작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76)을 만났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와 관련된 책이 있다면 윤석남 작가가 차지하는 페이지의 분량이 꽤나 묵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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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여름 오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윤석남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세련되고 커다란 공간이 여름의 자연과 잘 어울린다.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연 바람을 맞으며 느릿한 오후를 즐기고 있던 작가가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움직임이, 일흔이 넘은 작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고 살아 있다.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작가는 매일 한 시간씩 직접 운전으로 이동한다. 오전 11시부터 밤 10시까지 거의 같은 패턴이다. 오전 시간은 집 근처 산에 오르면서 체력을 단련하는 시간이고, 토요일은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시간이다. 예술가의 생활은 이렇게 규칙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그녀의 모든 작품이 완성된다.
전업주부에서 서예를 하다가, 그림으로 표현 수단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그렸는데, 어머니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지 2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나이 마흔에 늦깎이 화가가 된 윤석남 작가는 점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여성과 어머니라는 모티브로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말이지만, 윤석남의 작품들은 사람을 오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보는 사람이 여성이라면 더욱 울림이 크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어머니’ 시리즈부터 ‘핑크룸’, ‘1025’ 유기견 시리즈 등을 눈에 보이는 대로 감상하고서야 인터뷰 테이블이 마련됐다.

어머니를 그리는 작가
윤석남 작가의 이야기에는 늘 여성이 있었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업이었다. 자식을 돌보느라 손이 열이라도 부족한 어머니, 아이와 함께 서 있는 어머니,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 등. 이후 여성 최초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면서 여성주의 작가로서는 드물게 주류 화단에 진입했다. 그때부터는 자화상, ‘핑크룸’ 등 본인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개인전에서는 유기견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했다.
처음 그림 그린 대상이 어머니셨죠?
이전에는 ‘나는 뭘 그려야 하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 그 엄마를 그리고 싶었죠. 집에 작업실을 만들고, 일주일에 이틀 집으로 오시라고 해서 데생을 시작했어요. 이때 그린 어머니의 그림이 2년 후 열린 제 첫 개인전의 모티브가 됐어요.
여성주의 작가로 불리는 것은 어때요?
페미니즘 아트에 대해서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같은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저는 좋아요. 죽을 때까지 여성이잖아요. 여성의 삶을 잘 알고요. 저는 그림도 여성을 더 잘 그려요. 남자는 잘 알지도 못하고요. 많은 여성들이 당해온 이야기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여성을 테마로 하고 싶고, 나뿐 아니라 주변 여성들까지 파고들고 싶어요. 여성주의 미술가로 규정되어도 상관없어요.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셨어요.
기쁘면서도 당혹스럽기도 하고. 상 받기 이틀 전에 소식을 알려주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나를?’ 싶었죠. 미술계는 서울대와 홍대 출신이 주류였는데,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나에게 이 상이 오다니 싶더라고요. 저는 제 경험을 통해서 수상이 학벌도 아니고 음모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웃음)
선생님 작품의 최대 주제는 어머니죠.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내 엄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하셨어요. 어머니의 노동으로 살았어요. 엄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한 번도 가난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셨기 때문에요. 늘 깔깔거리고 낙천적인 분이세요. 그렇게 가난했으면서도 우리 앞에서 ‘앞으로 어떻게 사니’라는 소리를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힘드셨겠어요.
당시에는 오히려 잘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새록새록 생각이 나요. 95세에 돌아가셨어요.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세요?
역사 속 여성 이야기요. 저기 벽에 드로잉 보이죠? 무용가 최승희예요. 제가 허난설헌, 이매창 등 역사 속의 여성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인물 위주로 스토리를 풀어보려고 해요. 여섯 명의 여성을 주제로 하는 것이 목표인데 거상 김만덕, 최승희, 이매창, 허난설헌, 나혜석,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고민 중이에요. 이끌리는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작품은 소재도 인상적이에요. 나무, 자개, 너와 등등.
나무는 미국에서 전시를 보고 영감을 얻었어요. 평면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지루하고 너무 하기 싫을 때가 있거든요. 더 뭔가 튀어나오고 입체적인 뭔가를 하고 싶은데 1년 동안 아무것도 못 하던 시간이 있었어요. 82년도 개인전이 끝나자마자 꽉 막힌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우연히 나무 소재를 알게 되었죠. 소재에 대한 고민은 늘 해요.
아까 작업실 지하에서 봤던 ‘1025’ 유기견 시리즈도 근사했어요.
신문에서 혼자 유기견 1025마리를 키우는 할머니의 사연을 읽었어요. 저는 (그 사연에서) 어머니의 모성을 읽었어요. 이걸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장 그분을 찾아갔어요. 1025마리의 강아지들은 모두 버림을 받아 상처를 가지고 있어요. 그걸 보듬어주는 것이 여성의 존재의 힘이죠. 그 상처를 받은 강아지 한 마리, 한 마리를 표현하는 것은 저에게도 치유의 과정이었어요.
제작 기간도 길었을 것 같아요. 작업이라는 게 지난할 때가 있잖아요.
5년 정도 걸렸어요. 육체적인 노동이에요. 작업은 좋아하는 일이라서 인내는 아니지만, 가끔 지루할 때는 있어요. 그럴 땐 억지 부리지 않고 그냥 슥 해버리기도 하고, 순식간에 해버리기도 해요.(웃음) 좋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죠.
그게 예술의 힘인 거죠?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예술은, 이건 경험에 의한 이야기인데요. ‘죽어도 이거 아니면 안 되겠다’가 예술이고 예술인의 태도예요. 손재주가 아니고, 혼이 꽂히는 거죠. 영혼이 꽂히는 거. 전력투구를 얼마나 하느냐, 그게 예술이에요.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
남부럽지 않은 커다란 작업실, 주류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이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돈이 없어서 학업을 포기했고,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도, 더 일찍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것도 가난했던 시절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은 왜 못 가셨어요?
돈이 없어서. 서른아홉에 어머니가 혼자 되셨어요. 슬하에 6남매가 있었어요. 직업도 하나 없던 양반집 여자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때 언니가 이대 1학년이었고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막내가 두 살이었어요.
위대하시네요.
아버지 친구분들이 돈을 모아서 줬어요. 그 돈을 가지고 전셋집을 보러 다녔더니, 금호동에 가면 땅 30평을 거저 준다고 하더라고요. 집을 짓자 해서 흙벽돌로 집을 지었어요. 남자 조카가 설계하고. 방 두 개, 마루가 하나 있는 집으로 왔어요.
힘든 시간이었군요.
처음에는 이사 가니까 우리 집이라서 너무 좋았어요. 천장이 반짝반짝해서 뭔가 보니 별이더라고요.
꿈을 펼치고 싶은 후배들이 많이 찾아오죠?
여자들의 삶이 그런 것 같아요.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롤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저는 “시작하면 돼!”라고 말해줘요.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시작하지 못하지만,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흔, 화가가 되다
가난해서 대학에 가지 못하고 차선으로 돈을 벌었다. 6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지만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주부의 삶은 생각보다 무료했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화가가 되고 싶으셨어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자 마음을 먹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강렬한 장면이에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잘사는 학생 부모에게 레코드를 빌려서 들려준 거예요. 아버지 덕분에 피아노가 뭔지는 알았지만, 그 소리는 강렬했어요. 그 선생님이 오늘은 미술을 하자고 그러시면서 예쁜 아이를 앞에 모델로 앉히고 그리라고 하셨어요.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아이가) 자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어요. 그땐 크레용이 7개밖에 없었거든요. 까만색이랑 빨간색이랑 섞어야겠다고 혼자 생각을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화가라는 직업이 있는 걸 알았는지, 그때부터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 마흔에야 발현이 됐네요.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죠.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는 고통이 없었어요. 결혼 후 2년쯤 되니까 이게 사랑인가 회의가 오지 않겠어요? 서른두 살쯤 되니까 똑같은 일만 하는 결혼생활이 지겹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해 먹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면 11시. 그때부터 할 일이 없어요. 비극적이었어요.
육아나 살림이 적성에 맞지 않으셨군요.
결혼 후 8년 동안 아이가 없었어요. 딸이 하나 있는데 서른여섯 살에 나왔어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고, 한 번 읽은 걸 읽고 또 읽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연락도 일체 다 끊어버리고 살았어요. 비관적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 사람들이 우울증이라고 말하는 증상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림이 아니라 서예로 시작하셨어요.
돈이 없어서요.(웃음) 서른둘부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박두진(시인) 선생님이 글씨를 쓰신대요. 주부들 글씨를 가르치신다고.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그거라도 하니까 해방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왜 접으시게 됐어요? 서예는 재미가 없던가요?
4년 하다가, 서예로는 양에 안 차요. 남들보다 숙제를 몇 배를 많이 해가는데도요. 글씨를 있는 그대로 베껴 쓰는 걸 임서라고 하는데, 그걸 20년은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뛰어든 대한민국의 미술계는 어땠나요? 학벌의 벽도 많이 느끼셨어요?
저는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써요. 그걸 왜 신경을 써요. 미술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고 전시 하면 된 거죠. 그런데 대학 안 나온 게 참 속상해요. 체계적인 공부를 너무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 했잖아요. 나중에 독학으로 했지만, 여유가 있으면 학교에 다니는 건 나쁠 게 없다고 봐요.
열등감 느끼고 자학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죠?
연구를 하려면 대학을 나와야겠지만, 예술가들은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존 스타인벡도 무학이에요. 우리나라는 아직 학벌 문화가 남아 있지만, 그건 스스로 극복해도 될 문제인 것 같아요.
미국 유학도 다녀오셨어요. 이것 역시 쉽지 않은 행보예요.
첫 개인전 끝나자마자 남편이 “당신 그림 계속 그릴 거야?” 묻더라고요. “난 죽을 때까지 할 건데?” 이랬더니 공부를 더 해봐도 좋겠다고 조언을 해줬어요. 뉴욕에 있는 아트 인스티튜트인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에서 공부했어요. 남편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와, 부럽네요. 이 지점에서는 남편분과 따님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내 없이 엄마 없이 1년이나. 그때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시기죠. 우리 딸이 정말 예쁜 아이였거든요. 길을 가면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서 다시 볼 정도로요. 그런데 제가 유학을 다녀오니 아이의 식습관이 무너져서 살이 많이 쪘어요. 엄마로서 미안한 부분이에요. 그래도 절 이해해주는 가족이라서 감사해요. 가족들이 예술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본인의 꿈과 재능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한 것 같아요. 선생님의 가족은 그런 면에서 최고네요.
감사하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처음에 그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남편이 “10년 동안 고생 많았어. 하고 싶은 것 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고마웠죠. 나중에 남편 친구들에게 들으니 이랬대요. “취미로 잠깐 할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한대네”라고요.(웃음)
처음에는 집에 작업실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남편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셨나 봐요.
계속 감사하네요.(웃음) 남편이 잘 도와줬어요. 작업실은, 방을 텄어요. 같이 그림 공부 하던 부인들과 공동 작업실을 만들어서 함께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서 어머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아버지도 예술인이셨죠? 극작가시고 영화도 만드신 윤백남 선생님이요.
문화와 유희를 즐기는 분이셨죠.(웃음) 늘 글을 쓰시고 문화를 사랑하는 분이셨어요. 어렴풋한 기억으로 아버지가 보시던 화첩이 있었는데 그걸 제가 유심히 봤던 것 같아요. 그런 기억들이 화가로서 제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도 예술에 재능이 있으셨어요. 제가 우리 엄마를 참 좋아하는데요. 글씨를 잘 써서 출품도 하셨어요.
나이라는 촌스러운 틀
어떤 자리든 윤석남 작가가 페미니즘만큼 많이 듣는 이야기가 바로 나이 이야기다. 예술가에게 나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만큼 무의미하고도 한심한 일은 없지만,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또래의 여성 아티스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1939년생인 그녀가 매일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갑고 감사하다.
요즘은 어떤 작업 하세요?
황진이, 거상 김만덕, 허난설헌, 이매창, 나혜석을 생각하고 있어요. 여섯 명의 역사 속 여성을 작업하려고 해요. 그들의 인생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현대와 잇고 싶어요. 저는 영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허난설헌과 저 사이에는 무언가 설명하지 못하는 에너지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올드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신가요?
작품에 대해서는요. 늙는 게 나쁜 게 아니고 머리가, 사유하는 게 정지되는 데 대한 공포심이 있어요. 올드해지면 업데이트가 안 되니까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방법은 있어요. 호기심이에요.
아하, 호기심!
네, 키포인트는 호기심이에요. 호기심이 정말 귀중하다는 생각을 해요.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나는 이대로 산다가 되는 거죠. 저는 평생 영화, 책,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어떻게 해도 억제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귀중하다는 생각을 해요. 남들이 볼 때는 뜬금없이 비현실적이죠. 현실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올드함의 미덕도 있잖아요.
물론이죠. 올드한 게 좋은 면도 있는데, 올드한 것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어요. 깊이가 생기면 좋지만, 좋은 올드가 있고 나쁜 올드가 있어요. 뉴를 섞어야 해요.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점검을 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가 끊임없이 옳게 가고 있는 건지 점검을 해야죠.
평소에 매혹적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롤 모델을 만난 것 같아요.
후배들이 나에게 지어준 별명이 있는데 ‘호기심 천국’이에요. 호기심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채워지지 않으면 속상해요. 간단하게는 새로운 음식이라도 먹어봐야 하는 호기심까지 있어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허리를 다쳤어요. 허리에 철핀이 4개 들어 있어요. 이 나이에 몸에 철이 들어서.(웃음)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네 번은 새벽에 일어나서 산에 가요. 40분 정도 스트레칭하면서 몸의 근력을 키워요.
그림 말고 하고 싶은데 못 한 게 있다면요?
춤추는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웃음) 무대 올라가서 춤추고 그랬어요. 허리 다치기 전에 라틴 댄스를 2년 정도 배웠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요?
작품,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데, 친구나 언니와 대화하는 것 같아요.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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