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20cm…예술은, 한겨레, 2015.04.24

지상에서 20cm…예술은 허공에 ‘매달리기’

서울시립미술관 회고전에 나온 윤석남 작가의 2003년작 ‘붉은 밥’. 늘어난 팔로 심장을 꺼내 들고 있는 자화상을 나무판 부조에 담은 작품이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심장과 밥알의 친연성, 사람의 밥을 걱정하는 모성의 정감을 느끼게 한다.

서울시립미술관 ‘윤석남 ♥ 심장’전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센티미터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작가 윤석남(76)씨는 80년 40줄 주부작가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의 이력을 이 두줄의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일종의 ‘매달리기’다. 땅에 발붙이지 않고 허공에 존재를 내던지며 버티는 것이며 여성으로서 무엇인가를 갈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뜻이 함축된 ‘매달리기’의 고행을 작가는 30여년 감내해왔다. 그렇게 버티며 매달려온 힘이 나무쪽에 여성과 세상 낮은 것들의 이미지를 부려놓고, 부조된 여성이 팔을 길게 내려뜨려 아랫 생명을 품어안는 특유의 미학과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여성주의 미술 대모 회고전
여성성 고민 담은 50여점 망라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선 좁게 볼 수밖에”
지금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SeMA) 1층에서 윤석남 작가가 빚어낸 심장과 손길을, 역사속 여성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이 미술관이 원로작가를 집중조명하는 두번째 기획전시로 마련한 ‘SeMA 그린(Green): 윤석남 ♥ 심장’전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전범을 만들어낸 작가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매달리기’의 미학을 어떻게 변주해왔는지를 풀어 보여준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작가 윤석남

작가와 여성미술운동을 함께 했던 김홍희 관장은 전시를 기획하면서 회고전의 연대기적인 형식을 피했다. 1982년의 첫 개인전에서 어머니를 소재로 다룬 유화 그림부터 그의 대표작이 된 나무쪽 조형물, 드로잉, 설치작품과 최근 시작한 오리기 작업까지 50여점이 망라되지만, 어머니, 자연, 여성사, 문학의 4개 주제에 맞춰 제각기 연대가 다른 작품들을 내걸거나 진열했다. 여성성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고민과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도록 동선을 짠 것이다.
전시장에 펼쳐진 30년간의 주요 작품들은 여성성에 얽힌 성찰과 미술가로서의 조형 감각이 현실 앞에 부단히 변화해온 흔적들이다. 그는 일찍 남편을 잃고 자식들 6명을 키워내는데 삶을 바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1982년 첫 개인적 출품작 ‘무제’에 그런 어머니의 간고한 형상이 행상인듯 한 여성의 고단한 자태로 드러난다. 소외받는 과거·지금 여성들의 이미지들을 담은 나무판 설치작업을 90년대 창안하고, 이후 과거 역사상의 여성과 세상 생명에 대한 재조명을 거쳐 노년기 원숙해진 세상인식을 풀어낸 종이쪽 오림무늬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여느 작가가 따라올 수 없는 다기한 형식과 생각들이 그의 작업여정 속에서 명멸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돋보이는 근작은 전시장 가운데 자리한 눈물 흘리는 심장 조형물이다.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18세기 제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자기 재산을 팔아 쌀을 사서 섬사람들을 먹여살린 거상 김만덕을 형상화한 것이다. 쌀알 같은 눈물이 심장에 맺혀있는 이 조형물을 작가는 “여성성이 갖고있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자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김만덕의 마음”을 표상한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이매창의 부조와 작가의 환조상이 서로 푸른 종을 든채 손을 내밀어 맞잡는 설치작업에서는 역사를 초월해 여성성의 맥락을 교감하려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바닥에 흩어진 수백여개의 작은 나무쪽들에 세상을 살아가는 숱한 여성과 미물들의 얼굴을 새겨넣고, 고래를 인 여성이 숱한 나무쪽 물고기들을 이끌고가는 근래의 설치작업들은 그의 관심이 뭇생명들에 대한 애정과 포용으로 넓어져왔음을 일러준다. 작가는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여성성은 생명의 잉태에 머물지 않고, 나 아닌 다른 생명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을 느끼는대로 하고싶은대로 그린다. ” 6월28일까지. (02)2124-88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6882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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