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laboration 윤석남, 윤석구
– 윤석남, 그림 길 가는 날 –
기억하기에…살아난다.
결국 무덤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다.
사라진 것을 기억하려는 주변의 의지가 흙무더기 속에 염원으로 모여 있다.
아들을 가둔 영조의 후회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의 슬픔도 사도세자의 능 앞을 서성인다.
윤석남의 작업실이 이 융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실을 지나는 곳곳에 나무가 있다.
무엇을 해도 어느 것 하나에게 해코지 않는 나무의 삶은 여기까지도 이어진다.
그리 보면 평화는 요란스럽지 않게 살아가는 나무와 닮았다.
진부한 나무이지만, 변하지 않는 이야기이다.
작업실에 다다르자, 죽은 고목 하나가 서 있다.
그가 좋아했기에 옮겨 심은 나무였지만,
같은 자리를 사명처럼 지키고 사는 나무에게 낯선 곳의 물갈이는 힘겨웠을 것이다.
하기야, 그 누가 타향의 삶을 편안히 받아들이겠는가?
그는 자신의 무리한 욕심이 나무를 죽였다 말하며 마음 아파했다.
작업실엔 몇 십 년을 작가와 함께했을 작은 앉은뱅이 의자가 있다.
물감때가 묻고 묻어서 조화로울 정도로 닳아 있다.
옆으로는 생을 마쳐 지붕이 되고, 막이의 쓰임을 다한 너와들이 있다.
비바람에 맞고 맞아야 나타나는 무늬가 올라있다.
정말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모를 최고의 나무라, 그가 이야기했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그의 작품과정을 따라본다.
기다리다보면 나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일생을 맞고, 듣고, 지키기만 한 나무도 마지막 쓰임을 할 때는 스스로 입을 여는가보다.
그가 붓을 드는 순간도 그런 때가 아닐까? 나무 스스로 실루엣을 띠게 되는 바로 그때,
색때 묻은 의자에 앉아 옹이가 이야기를 풀면 그는 입을 그리고, 결이 마음을 누이면 그는 가슴을 그린다.
윤석남이 바라보다 불러가면 서서히 그 상(像)들이 올라온다.
반은 세월이 그리고, 반은 자신이 그린다는 ‘주름의 원리’가 선을 이어간다.
나무와 다생지연(多生之緣)으로 붓을 주고받는 시간이다.
아직 자신을 보여주지 않은 나무들은 도도한 아씨처럼 다른 쪽에 모였다.
보여주지 않음은 저항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에도 위해 없는 삶을 살았던 당당한 자존심일 것이다.
언젠가는 저 너와에도 그릴 수 있겠지, 여유롭게 이야기하는 그다.
윤석남이 새침한 너와의 자상(自相)을 조용히 기다린다.
지하, 버려진 개들의 조각 사이로 뭉쳐진 사람의 무리가 보인다.
나무에 그려진 얼굴들이 빼꼼히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버려진 현실의 사람들은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떠나온 곳을 간절히 바라보지만, 몸은 반대로 헤맨다.
살고 싶어 떠났지만, 향하는 곳에 희망이 있을지는 더욱 알 수 없다.
‘보트 피플’, 버려진 사람들, 그가 나무에 그려간 땅 없는 자들의 얼굴이다.
음영의 농담이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눈가에 번져 간다.
만다라화(曼茶羅華)는 다시 피어난다.
그래도 살아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이가 있어, 다시 살아난다.
버려진 삶도 기억하기에 살아나고, 찾아가기에 재생한다. 연꽃은 망향의 한 가운데서 다시 태어난다.
떠나는 길, 내몰려질 사람들의 눈빛 하나하나가 지나는 가지 위에 걸려있다.
글 김승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