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 작가 “너희가 이런 식이었어? 그럼 난 여자를 그릴게”

윤석남 작가 “너희가 이런 식이었어? 그럼 난 여자를 그릴게”

서울문화투데이 I 2023.11.29. I 이지완 기자

윤두서의 초상화에 충격…동양화로 변경, 초상화 그리기 공부
일제 강점기 이전 여성초상화 단 세 점밖에 없어 분노
‘여성’ 이야기를 하는 것, 내 당연한 사명,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한계에 가두지 않길
정직하고 곧은 어머니, 가난 속에서도 자존 지켜줘
가정주부 월급 받으며 당당하게 작업 시작한 40대
잊히고 싶지 않아, 사람들에게 감동 주는 작가이고파
제 23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 대구미술관 《윤석남》展, 12월 31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이지완 기자] 《제 3회 제주비엔날레》에서 윤석남의 작품을 만났었다. 박능생 작가의 제주도 전경 <제주-탐라 여지도>와 함께 전시된 거대한 하트 모양의 설치물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였다. 이와 함께 김만덕의 서사를 담고 있는 드로잉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쳤을 당시 전 재산을 풀어서 제주 백성을 살려냈던 거상이자 의녀였던 김만덕의 의로움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윤석남 작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여성주의 작가로 알고 있었다. 영화든, 소설이든, 미술이든 여성의 이야기는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기에 마음 한편엔 항상 응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석남 작가 ⓒ서울문화투데이

지난해 윤석남 작가의 이인성 미술상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윤 작가를 떠올리게 됐다. 윤석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윤 작가가 마흔 살까지는 가정주부였고, 그 이후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한 처음에는 서양화를 했고, 설치 작업을 했으며, 이후 동양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의 행보를 보면서, 언제나 개척하고 있는 작가라고 느꼈다. 그리고 강렬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본지 이은영 발행인은 윤석남 작가를 떠올릴 때마다 박완서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여성의 삶을 살고, 또 그 바탕을 통해 창작을 일궈낸 여성 작가들이었다. 이달 초 화성에 자리하고 있는 윤 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겨울날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추운 날씨였다. 윤 작가의 작업실은 융건릉 근처에 있는데, 큰 도로가 있는 지역은 아니었다.

화성에 윤 작가가 작업실을 마련하게 된 것은 1980년 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소설 『자유부인』을 펴낸 소설가 정비석 선생 덕분이었다. 60년대쯤 문인들이 하도 배를 곯고, 가난하다 보니, 돈을 조금씩 모아서 화성의 땅을 사기 시작했다. 거기에 윤 작가도 함께한 것이다. 땅을 조금씩 사서 나중에 이곳에서 집을 짓고 살자는 것이 문인들의 꿈이었고, 윤 작가는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게 됐다. 2층으로 마련된 윤 작가의 작업실은 큰 수장고와 작업 공간으로 나뉘어져있다. 작업 공간에는 목판 작업도 했기에, 절단 기계도 찾아볼 수 있었다. 윤 작가의 작업실에선 나무와 먹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층고가 높은 작업실에서 2시간 여 진행된 인터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그의 이야기와 함께 40여년의 시간동안 작업을 이어온 윤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여성주의’ 작가라는 칭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윤 작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었다고 답했다. 윤 작가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었다면 그림그리지 않았다”라고 답하는 그의 태도와 이어졌다. 윤 작가는 무엇에 이끌리는 듯 작업을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하나의 기사를 통해서 생명에 대한 사랑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윤두서의 초상을 만나 초상화 작업을 시작해, 현재 여성독립운동가 초상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윤 작가는 자신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에서는 강인하게 밀고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큰 키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왠지 윤 작가는 커보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 23회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고,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소감을 듣고 싶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전시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정성껏 준비해줬다. 전시회 한 것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에 든다. 내 작업 중 꼭 보여줄 것을 선별해서 잘 보여줬다. 이정민 학예사가 담당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흡족했고, ‘내가 작가하길 잘했구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지금 대구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전시는 내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자리여서, 주제가 있거나 특별히 부각시킨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여성독립운동가의 초상을 많이 선보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윤석남 작가가 작업실 책상에 올려두고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작품스케치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투데이

윤석남 작가를 한국 여성주의미술의 시작이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처음에는 ‘여성주의’라는 말에 굉장히 거부감이 있었다. 무슨 주의라고 하는 것이 영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내게 ‘여성주의 작가’라는 호칭이 생기면, 내 세계의 일부분이 한정된다고도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줄반장도 하지 않을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이런 나에게 어떤 ‘제목’이 붙는 것은 너무나 큰일이었다.

그런데 내 첫 번째 전시 주제가 ‘어머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버지보다도 더 사랑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로 작업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일생을 시작으로 나는 여성의 이야기를 했다. 작품을 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장 잘 아는 것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게 여성이었다. 나도 여성이고, 어머니도 여성이고, 이 땅 위에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명명 이전부터 내게 ‘여성’의 이야기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주의 작가’라는 것에 있었던 거부 반응은 작은 의미의 모성은 거부하고자 했던 마음과 같았다. 나는 엄마와 자식 간의 ‘모성’ 만을 얘기하는 것에는 거부 반응이 있었다. 모성을 포함한 ‘여성주의’에 대해 생각했다. 자연을 살리고, 전 지구가 함께 나아가는 삶을 택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 이런 여성적 감수성이 ‘모성’이라고 본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존재다. 남성의 정자를 받아서 몸 안에서 10개월 동안 아이를 키워서 낳게 되는데, 이는 남성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다. 이런 모성을 근간으로 ‘여성주의’라는 세계를 확장하게 됐다. 이 모성으로 지구를 살려야 하지 않을까, 함께 살아가고, 모두가 자유를 만끽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세계를 넓혀갔다. 궁극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여성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윤석남, 우리는 모계가족, 2018, 한지에 분채, 70.5×47.5c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기사 이어서 원문보기: 서울문화투데이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910

윤석남 개인전에서 여성의 삶, 역사, 현실을 만나다, 여성신문
“한 명 한 명 대화나누며 그린 70명의 여성독립운동가…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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