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 개인전’… 중앙일보, 2013.10.21

윤석남 개인전·’텔 미 허 스토리’ … 여성주의의 진화 엿보는 두 전시

[중앙일보] 입력 2013.10.21 00:24 / 수정 2013.10.21 10:09
여성과 미술 … 남녀를 넘어, 모든 생명 품으며

인간은 자연에 함부로 이름을 붙이고, 훼손시킨다. 70대 중반의 윤석남 화가는 그 자연을 살려내듯 녹색 한지를 한 장 한 장 오려 꽃·나뭇잎·동물·사람 문양을 아로새겨 온 벽에 붙이고, 바닥엔 녹색 구슬을 깔았다. 동아시아 여성들의 가내 수공업이던 종이공예와도 맥을 같이한다. 녹색 탁자와 의자엔 연꽃을 그려 넣었다. 광합성 하는 듯 생명 가진 것들의 재생과 화해를 시도한 윤씨의 신작 ‘그린룸’. [사진 학고재]

윤석남(74)은 1996년 설치 ‘핑크룸’을 내놓았다. 화려한 핑크색으로 치장했지만 실은 뾰족한 것들이 솟아 있어 앉을 수 없는 의자가 놓인 방이다. 제 집에, 제 삶에 제자리가 없는 여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담은 방이었다. 그리고 17년 뒤, 이 여성주의 미술가는 녹색 한지를 자연과 동물 문양으로 오려 붙인 ‘그린룸’을 선보인다. 윤석남 개인전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린다.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 미술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텔 미 허 스토리(Tell Me Her Story)’전을 연다. 전복과 발언의 여성주의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주변까지 품은 여자들의 이야기다. 두 전시는 여자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다.

#1. 사람도, 동물도 껴안은 방

윤석남 작가
윤석남은 주부로 살다가 마흔 살에 화가로 데뷔했다. 열다섯 때 아버지(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만든 윤백남 감독) 별세 후 6남매를 책임진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전시였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우며 스스로 쪼그라드는 것 같던 그때, 늙어 꼬부라진 어머니 앉혀 놓고 2년 내내 그리고 또 그린 그림들이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 주부화가의 전시엔 ‘아줌마 관객’들이 와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다 갔다.

그는 이렇게 해서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가 됐다. 2008년엔 1025장의 나무판에 유기견을 그리고 깎아 설치한 작품을 내놓으며 여자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품을 넓혔다. 사람들이 저 좋다고 기르다가 내버린 반려견을 진혼한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는 현재 경남 합천군 해인사 앞 소리길에 설치돼 있다. ‘해인아트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들이 안식처를 찾았다.

학고재 갤러리에서 4년 만에 여는 이번 개인전의 시작은 가로 세로 30㎝의 흰 종이를 오려 만든 ‘화이트룸’, 존재는 죽음 이후 빛이 되리라는 긍정을 담았다. 이어 과거 강원도 화전민들에게 기와 대신으로 소임을 다하고 버려진 너와 40여 개의 낡은 나뭇 결대로 여인네들을 그린 작업, 마지막 방은 동물 모양, 나뭇잎 모양으로 무늬를 낸 녹색 종이로 가득해 숲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내는 ‘그린룸’이다.

그린룸은 더이상 여자들의 방이 아니다. 사람도, 동물도, 생명 가진 모든 것을 품는 방이다. 그 방안에서 노화가는 말했다. “나 역시도 꼬부라지고, 미워하는 마음이 참 많았는데 녹색 종이를 오리면서 그런 게 좀 누그러집디다.”

“사람들이 너무도 오만하게 대상에 함부로 이름을 붙이며 재단하는 경향이 있지 않느냐”며 부러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그의 전시엔 ‘나는 더 이상 여성주의 미술가만은 아닙니다’라는 부제를 붙여야겠다. 다음달 24일까지. 02-720-1524.

기사원문보기: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3/10/21/12502395.html?cloc=olink|article|default

'옹이는 입이 되고 갈라진..', 경향신문, 2013.10.21
'윤석남 작가, "나는소나무가.., 스포츠서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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