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의 미술과 여성 이야기 – 김현주

윤석남의 미술과 여성 이야기

윤석남의 미술과 여성 이야기
김현주 | 추계예술대학교 겸임교수

윤석남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로서의 입장과 역할을 진지하게 수행해온 인물이다. 여성의 삶을 그린 미술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그녀의 예술적 행적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도 넘친다. 또한 그녀는 여성주의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평등사회를 향한 페미니즘의 목표를 실천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런 활동은 현대미술을 지탱해온 순수성의 개념과 당연한 전제들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활동이 그녀의 나이 40이 넘어 시작되었다는 점은 믿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이 독학으로 이뤄낸 결과라면 더욱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뒤늦은 출발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원동력이 되었을지언정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실천력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것이 오늘의 윤석남을 만든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예술이란 고상함이나 순수한 미적 탐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녀는 삶과 결부되지 않거나 소통할 수 없는 예술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에는 자전적 이야기든 다른 여성의 이야기든, 주제가 되는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 주제는 모성, 자아 정체성, 여성사, 돌봄의 윤리라는 단계로 진행되었고, ‘어머니’, ‘핑크 룸’, ‘블루 룸’, ‘늘어나다’ 등 보다 구체적인 소주제 아래 재현되었다.

윤석남은 미적 요소나 적절한 조형 언어의 모색 또한 주제만큼 중요하다고 믿는다. 회화와 드로잉 중심의 표현 방법은 1990년대 들어 조각과 설치로 전환되며 공간적 확장을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드로잉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다.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그녀의 작품은 당대 여성주의 담론과 미술에서 주요 쟁점을 끌어내거나, 또는 그 담론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여성주의 미술의 새 장을 하나씩 써나가고 있다.

독학으로 이룬 미술가의 꿈

미술가로 인정받기까지 윤석남에게도 10년이 넘는 혹독한 훈련과 좌절, 회의와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고 그에 버금가는 제도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기에 초기 시절의 그녀에게는 “주부화가”, 심지어 “규수작가”라는 모멸적인 호칭이 따라다녔다. 현재 작가의 위상을 고려할 때, 이런 호칭은 상상하기 힘들며 기억하는 이조차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역량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들을 지속적이고 진지한 작품 제작과 발표를 통해 불식시켰다.

그녀의 이력을 살펴보면 우선 나이 마흔에 왜 미술가가 되려고 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지금은 결혼한 여성들이 자아실현을 하기에 상황이 훨씬 좋아졌지만, 윤석남 세대의 여성들에게는 꿈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여성에게 중년은 가사와 더불어 출산, 양육 등의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자신을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때이다. 삶의 갈등이나 작품 제작의 동기 결여, 능력에 대한 회의 등 복잡한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미술계를 등지는 나이에 이룬 윤석남의 미술계 등단은 그래서 더욱 예외적이다.

고달픈 인생 여정을 통해 미술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반 고흐나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술가의 길을 택한 요제프 보이스처럼 미술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유명 남성미술가들의 숙명적 이야기에 비한다면, 윤석남의 삶에서 미술가가 되는 필연적 통과의례를 말해줄 변변한 에피소드란 고작 중년에 시작한 서예 공부 정도이다. 원하는 직업에 대한 좌절, 죽음의 경험 등 남성미술가들의 에피소드에 담긴 거창한 사회적, 철학적 동인에 비해 윤석남의 에피소드는 사적인 차원을 넘지 못하기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역사 속의 많은 여성들이 규범화된 삶의 틀을 벗어나는 작은 시도들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더 큰 것에 도전할 용기를 얻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윤석남의 서예 공부는 36살 때 한 가정의 아내로, 딸 하나를 둔 어머니로, 또 시어머니를 모시는 주부라는 역할 속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해 시작된다. 그녀는 시인 박두진에게 서예를 배우는 4년 동안 하루에 수백 장씩 미친 듯이 글쓰기 연습을 했다. 그 수련 과정에서 자기표현에 대한 강한 욕구를 발견한 윤석남은 화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고, 곧 개인 화실을 운영하던 이종우 화백의 화실에 들어가 6개월쯤 본격적인 드로잉과 회화 교습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결혼 이후 가정의 틀에 갇혀 자아 상실과 갈등을 겪으며 병들어버린 그녀의 마음이 치유되었고, 그 후 미술은 작가에게 존재 의미 자체가 되었다.

서예 교육이 작가에게 남긴 또 한 가지 중요성은 작품의 제작 방법에 대한 영향이다. 그때까지 변변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붓글씨를 통해 배운 유연한 붓놀림에 매우 익숙해졌다. 초기 회화 작품들은 주로 서양 붓과 유화물감을 이용해 제작되었으나, 1990년대에 나무를 매체로 사용하면서부터 서예 붓을 이용한 자유로운 붓놀림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표면 저항력이 강한 뻣뻣한 서양 붓과 유화물감을 충분히 익힐 기회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화 제작을 멈춘 이유는 아니었다. 캔버스나 종이의 표면과 달리 불규칙한 나무의 표면에 즉흥적이며 자유로운 드로잉에 가까운 형태를 묘사하고자 했던 작가에게는 순간적 촉감이 전달되는 유연한 서예 붓과 아크릴 물감의 조화가 가장 적합한 표현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술가가 될 것을 결심한 윤석남은 몇몇 단체전에 참가하면서 화단 진출을 모색했고, 1982년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우연치 않게 미술회관(현재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 행운을 얻었는데, 이때 어머니와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성들의 사실적인 묘사가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고, 어머니의 생애사는 그 후 10년이 넘도록 작가가 몰두한 주제가 된다.

개인전에서 호평을 받은 후 실력 향상에 대한 욕망이 커진 그녀는 미국으로 가서 미술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윤석남은 1983년 1년간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머물며 프랫 인스티튜트의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미술 공부에 열중하였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는 명망이 있는 평생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리 크래스너, 헬렌 프랑켄탈러, 에바 헤세 등 유명한 미국 여성미술가들이 거쳐 간 곳이다. 미술 공부를 하러 갔으면 정규 미술대학에 진학할 것이지 하는 의아심이 드는데,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1년 중퇴 학력에 남편과 어린 딸, 시어머니를 두고 유학 간 ‘유부녀’라는 입장을 고려한다면,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만으로도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녀는 정규 미술교육은 고사하고, 정규 대학교육조차 교육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포기해버린 자신의 선택을 못내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전공이 무엇이든 대학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오히려 자신을 채찍질하는 긍정적인 동인이 되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미술은 물론 사회, 철학, 역사, 문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풍부한 독서를 하였고, 이는 생활 습관의 하나로 굳어졌다.

여성주의 미술가로 태어나기

1984년에 귀국하여 1989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5년의 시간은 윤석남에게 미술의 방향을 찾기 위한 타협과 갈등의 시기였다. 귀국 직후 작가는 거주지인 구반포 아파트 근처에서 작업을 하던 김진숙, 김인순 등과 자주 왕래하였다. 결혼한 또래 화가인 이들은 여성과 미술가라는 상충하는 두 개의 정체성을 오가며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는 자신들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였고, 1985년 ‘시월모임’을 결성하여 두 차례의 전시회를 갖게 된다.

이 무렵 국내 화단은 순수미술과 참여미술로 양분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단색회화 양식을 통해 모더니즘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경향이 제도권의 지지를 받았던 반면, 미술의 소통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사실주의 양식을 복원하고 민중과 민족의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참여미술 경향, 즉 ‘민중미술’로 불리는 미술이 이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1980년대 미술은 순수형식 대 이데올로기, 추상 대 구상 양식의 대립과 더불어 점차 기성세대(아버지) 대 신진세대(아들)의 첨예한 대립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경향은 강한 남성성의 발현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는데, 한쪽은 순수한 정신적 초월을 통해, 다른 쪽은 강인한 육체성을 통해 미술이 남성적 영역임을 강조하였다.
어떤 미술가도 시대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더러, 미술가로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서는 사회 문화적 지지 기반과 동료 집단과의 정서적 교류, 정보의 공유가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 국내 여성 작가들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남성들보다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며 화단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확보해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 직면한 ‘시월모임’의 멤버들은 서로의 작업을 북돋기 위해 뭉쳤으며, 여성의 삶의 경험에 대한 사실적 표현을 중시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순수한 형식을 지향하는 모더니즘 미술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민중미술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시월모임’의 첫 전시는 정해진 주제 없이 드로잉 대작을 발표한 것인데, 당시 미술 잡지에 새로운 그룹으로 소개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주부화가”로 호명되고, 그 열정은 “아마존 여인”의 극성스러움에 비교 당했으며, 작업의 질에 대한 평가는 노동의 양으로 대체되었다.

1986년에 열린 두 번째 전시는 달랐다. 〈반에서 하나로〉라는 제명으로 열린 이 전시는 여성주의 미술의 출현을 예고한 최초의 전시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고, 문화계와 여성운동 관계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당시 여성문제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전시에 출품되었던 윤석남의 〈손이 열이라도〉, 김인순의 〈현모양처〉, 김진숙의 〈내일을 향하여〉 등은 여성이 경험한 구체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 작품들로 기억된다. 광주리를 이고 돈을 세는 손, 주걱과 양동이를 들고 가사 노동 하는 손, 아이를 양육하는 손 등 쉴 틈 없는 하층 계급 어머니의 희생과 고통이 묘사된 〈손이 열이라도〉와 집이란 울타리에 갇혀 물질적 풍요에 안주한 채 자아를 상실한 중산층 주부의 모습을 그린 윤석남의 또 다른 작품 〈L부인〉은 계급을 망라하고 주체적 삶을 꾸리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시월모임’의 멤버들이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70년대 말 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여성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과 경험을 통한 자각으로 보인다. 이들은 전시 준비를 위해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를 찾아가 여성문제를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서 공부하고, 자신들의 체험을 여성문제와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분노의 폭발이라거나 세련된 형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는 여성이 여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최초의 여성주의 전시로 평가되고 있다.

〈반에서 하나로〉전 직후 ‘시월모임’ 멤버들은 두 가지 제안을 받게 된다. 하나는 1986년 12월에 발족한 ‘민족미술협의회’(이하 약칭 민미협) 측으로부터 여성미술분과의 설치와 운영을 의뢰받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하나의 문화’(이하 약칭 또문)의 모임에 초대된 것이었다. 윤석남과 김진숙은 양쪽 제안을 수용한 반면 김인순은 ‘민미협’ 활동에만 몰두하며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이때의 선택이 윤석남의 작업 방향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을 미칠 줄은 아마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민미협’ 내 여성분과의 중추적 멤버로서 1987년에 열린 〈여성과 현실〉전 등에 참가했지만, 민중미술계 내부의 경직되고 조직화된 분위기나 여성사회단체와 결속된 집단 미술활동에 동참을 요구하는 분위기 때문에 큰 부담을 느끼고 갈등을 겪는다.

반면 1984년 대안적 여성주의 문화운동을 전개한다는 목표 아래 소장 여성학자와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또문’은 자유로운 창작과 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개방적 분위기였기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경험과 이론을 아우르며 다양한 여성문제를 논의하는 ‘또문’의 모임을 통해 그녀의 여성의식은 점차 발전되었다.

‘또문’과의 교류는 1988년에 열린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해방시와 그림의 만남〉(이하 약칭 〈우리 봇물을 트자〉)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전시에는 윤석남과 김진숙을 위시해 여성의 현실에 관심을 가져온 사진작가 박영숙, 신진미술가 정정엽 등 네 명의 미술가가 제작한 서른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는 고정희, 김혜순, 천양희 등 10여 명의 여성 시인들과 1년여 동안 그들의 시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실현된 것이었다.

윤석남이 출품한 10여 점의 작품들 중 〈청량리 588번지〉, 〈나혜석 콤플렉스〉, 〈우리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등은 각각 김경미, 김승희, 고정희 시인의 동명 시를 형상화한 것이다. 여성주의 미술의 전통이 전무한 상황에서 제작된 이 작품들에는 여성의 억압적 현실과 자아 발견, 모성과 자매애라는 여성주의 문화의 주요 화두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지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검은 잉크로 씌어진 글쓰기가 이성, 곧 남성의 영역으로 여성 억압이 재생산되는 장소였던 것과는 다르게, 여성의 글쓰기는 “하얀 잉크”(모유), 곧 몸으로 쓰는 행위이며 역사의 무대에 여성 주체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란 프랑스 여성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이 아직은 생소한 때였다. 여성적 글쓰기는 대립적인 것들의 경계를 탈영역화하기 위한 대안으로 점차 관심을 끌었고, 이런 창작 방법은 미술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나혜석 콤플렉스〉는 바로 몸을 매개로 한 여성적 글쓰기를 미술에 적용한 초기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그녀의 지식과 그것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이 작품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시 구절의 충실한 전달 대신에 새로운 형상화를 추구한 노력이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봇물을 트자〉전은 주목을 끄는 데 실패했다. 현대미술의 탈문학적 경향이 아직 지배적이었고, 여성주의 문화 운동이 주변화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 후반 국내의 복잡한 사회와 정치적 여건의 파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통해 윤석남과 박영숙은 평생 동지 의식을 다지며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둘 사이의 의식의 교류는 종종 공동 작업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우리 이야기〉(1992)나 박영숙의 ‘미친년’ 연작 중 윤석남을 모델로 찍은 〈인물 7〉(2002)이 좋은 예다. 세대차가 나는 정정엽과도 공동체 의식을 발전시켜 장차 국내 여성주의 미술을 함께 이끌어 갈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또문’이 윤석남에게 정신세계를 성숙시켜준 외적 수혈의 공급처였다면, 민중미술은 미술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제공하는 내적 기반이었다. 19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이 정점에 달하며 민중미술은 노골적인 사회 참여와 집단 미술 창작에 매진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작품의 주제만큼이나 자유로운 창작 분위기와 미적 탐구를 중요시했던 그녀는 민중미술에 대한 의무감과 낯선 표현 방식 사이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과 갈등을 겪는다. 윤석남은 그런 중압감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1989년 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고, 그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를 회상할 때 작가는 아직도 민중미술에 대한 부채의식을 언급하곤 하는데, 민중미술 진영의 경직된 분위기는 이미 알려진 바 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서 이제는 그녀가 자유로워지길 필자는 바라고 있다.

어머니의 크나큰 사랑의 힘

한국으로 돌아온 1991년, 윤석남은 몇 가지 큰 변화를 보였다. 첫째, 미술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다는 예술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점이다. 둘째, 여성주의 문화운동과 여성주의 미술을 추구한다는 목표 의식이 더욱 확고해졌다. 셋째, 표현 방법에 대한 관심이 평면을 벗어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조각과 설치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작가가 두 번째로 미국에 체류하던 기간은 20여 년 동안 전개되어온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재평가와 다문화주의 운동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198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 퍼진 다문화주의는 인종과 성적 취향 등의 이유로 억압당해온 소수자들의 예술 활동이 표면화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성주의 미술 또한 20여 년의 역사를 재평가하며 다문화주의와 연계하여 내부의 인종적, 계급적 배타성을 수정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들이 열리기 시작할 무렵 윤석남은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보고 여성주의 미술의 힘을 발견했다. 또한 1990년 브롱스 미술관의 남미작가전에서 나무판에 혁명가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의 민주인사 로메로 신부 등의 인물을 마치 행진하듯 입체적으로 새긴 한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새로운 표현 방법을 고심하고 있던 차에 나무를 이용한 생생하고 입체적인 표현과 설치 방법은 그녀의 뇌리에 강하게 기억된다.

귀국 후 선조 여성 예술인의 흔적을 찾아 나선 윤석남은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를 방문했다. 그녀는 여기서 주워 온 감나무 가지의 투박한 질감을 보듬으며 미국에서 보았던 나무 조각의 강한 인상을 떠올리곤 둘의 결합을 시도했다. 1990년대 초 버려진 나무를 이용한 입체 조각은 이렇게 탄생했다. 처음에 거칠고 쓸모없는 나무를 사용하던 것이 점차 정제된 나무로 바뀌지만, 그녀는 나무라는 재료를 정성스럽게 깎고 갈고 다듬으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작가는 피그말리온 신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트가 아니다. 그 재료에서 모진 풍파를 겪은 자신의 어머니의 거친 피부를, 허난설헌의 인생을, 이름 불리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살려낸다. 나무를 다룰 때 평면작업에서 얻지 못하던 촉감의 희열을 느끼는 한편, 설치라는 전시 방법을 통해서 이야기를 더욱 연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윤석남은 페미니스트 문화 운동과 미술이라는 두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여성주의의 지평을 넓히고자 노력했다. 1997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10년 동안 그 단체를 이끌며 문화운동을 주도했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출범한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신문의 표지 그림을 제작하는 등 미술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개입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미술 분야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접근은 자신의 뿌리 찾기로부터 시작한다. 그 대상은 혈통적 뿌리인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근대와 역사 속의 이름 모를 여성들, 허난설헌, 이매창, 나혜석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뜻을 발휘하지 못한 채 비운의 삶을 살다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 여성 예술인들, 그리고 자신과 의식을 공유해온 당대의 여성주의자들까지 확장된다. 간단히 말해 그녀의 주제는 근대 여성 주체를 재구성해내는 것과 여성 계보의 추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주제에 대한 모색은 1993년부터 열린 세 차례의 주요 개인전, 〈어머니의 눈〉(1993), 〈빛의 파종〉(1997), 〈늘어나다〉(2003)를 통해 이어진다.
여성들과 소수자들은 인류 발전에 기여한 영웅이나 천재들의 위대한 업적 중심의 역사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찮은’ 여성들의 존재는 자전적인 이야기와 기억에 의해 되살아난다. 그들의 이야기는 매끈하게 봉합된 위대한 민족의 역사에 틈바구니를 만들어 그 안에 감추어진 붉은 속살과 상처들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시사는 거시사에 저항해 그 허구성을 들춰내는데, 미시사에서 드러나는 여성 주체들은 그저 사회의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었다. 유교적 문화 전통과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체계 속에서 여성들은 때로 그것을 받들기도 하고 때로 그에 저항하거나 타협하기도 하면서 실천적 삶을 살아왔다.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경험과 목소리로 가득 찬 여성사(Herstory)의 재구성은 일반 역사, 곧 남성 중심의 역사(History)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주목해온 사안인 만큼, 윤석남의 오랜 관심사이기도 하다.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서 작가는 모성의 재해석과 새로운 여성사 쓰기를 실험한다. 국내 여성학과 문학 분야에서 모성 담론이 한창 쟁점화되던 때, 미술계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모성의 의미를 모색한 이 전시는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자전적인 경험에 기초한 당시 작품들은 모성에 잠재된 사랑과 보살핌의 힘과 기쁨을 발견하고, 여성의 구체적인 체험으로서 모성의 형상화를 모색한 것이었다.

작가의 삶에서 어머니는 각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를 그려왔고, 꼭 한 번은 어머니의 삶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윤석남의 어머니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반복해서 작품에 등장한 것일까? 그녀의 어머니 이름은 원정숙, 19세에 윤석남의 아버지 윤백남과 결혼했다. 윤백남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소설, 연극, 영화계에 몸담아 온 문화예술계의 원로였다. 문학을 좋아하는 앳된 하숙집 딸이던 어머니와 집안에서 정혼한 부인과 별거 중인 중년의 소설가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만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위의 두 언니에 이어 셋째 딸로 태어난 윤석남은 부모님의 아들 소망 덕에 사내 남(男)자가 든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부모님은 아들과 딸을 동등하게 대해주셨고, 특히 그녀는 아버지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녀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는 예술에 대한 열정만 물려준 채 변변한 재산도 없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어머니의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다. 몸밖에 가진 것이 없던 어머니는 그 후 몸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노동과 행상으로 가계를 꾸리며 일곱 남매를 훌륭히 키워냈다. 신세 한탄이나 푸념을 늘어놓을 만도 한데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고된 일과 후에도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며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몸소 실천하며 자식들이 자긍심을 잃지 않게 지켜주셨다. 작가는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깊은 사랑과 삶에 대한 용기에 감사하고 존경을 표하며, 모성에 내재한 실천적 힘과 가부장제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런데 왜 전시 제목이 어머니의 ‘눈’일까? 눈을 통해 사람들은 세상을 본다고 하는데, 내가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도 나를 본다. 나를 타자화시키는 이 눈을 ‘응시(gaze)’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늘 맞물리며 그 관계는 불공평하다. 응시에도 성별 차이가 개입되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여성의 눈은 부재하거나 남성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주체가 타자의 응시에 의해 구성된다는 포스트모던 주체 이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시선의 문제는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은 응시의 역사성이나 사회와 문화적 변동 요인, 또는 실천적 역동성, 성별 차이를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응시의 구조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설명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응시를 전복시킬 가능성에 대해 고심했고, 윤석남 또한 그 문제를 심각하게 탐구했다. 응시에 저항하는 한 방법은 여성에게 개별적인 눈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전시장 곳곳에 편재해 있는 ‘어머니의 눈들’은 강렬한 힘을 발하는데, 그 결과 하나의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던 여성의 몸은 사라지고 삶의 리얼리티가 각인된 몸이 드러난다.

어머니의 시각에서 제작한 작품들로는 〈어머니〉 연작, 〈족보〉, 〈엄마와 딸들〉, 〈아들, 아들, 아들〉 등이 있다. 이것들은 전근대와 근대를 살아온 여성들의 체험적 모성을 그린 것이다. 이 중 〈어머니〉 연작은 근대 여성사를 담은 사진 이미지를 배경으로 〈열아홉 살〉, 〈딸과 아들〉, 〈요조숙녀〉, 〈대문 안에서 밖으로〉, 〈가족을 위하여〉, 〈벤치에서〉란 제목의 여섯 점으로 구성된다. 이 연작에서는 열아홉 살에서 노년에 이르는 어머니의 삶의 역사를 통해 결혼이란 제도 속에서 모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연대기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내적 열정을 지닌 젊은 여성이 출산과 양육, 가사 노동 등 하찮게 여겨지는 여성의 노동으로 인해 점점 웅크린 노년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 모습은 덧대고 거칠게 파내어진 폐목 쪼가리와 빨래판, 문짝 등을 통해 표현된다.

보편적 어머니상에서 기대되는 풍요와 평온을 상징하는 풍만한 몸과 인자한 표정은 온데 간데 없다. 그 대신 〈가족을 위하여〉에서 보듯 밥 짓고 빨래하는 어머니의 일상이 드러나고,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막한 때 아이들을 두고 멀리 갈 수 없어 문 밖에 앉아 곡물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의 현실이 〈대문 안에서 밖으로〉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남아선호 사상을 표현한 〈아들, 아들, 아들〉의 어머니들의 모습에서는 세월의 흔적과 깊은 주름이 두드러진다.

〈족보〉에서는 아들을 낳고 당당히 앉아 있는 여성과 그렇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맨 여성의 대비가 과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기표인 거대한 족보를 배경으로 아들의 생산 여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 두 여성은 족보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권력을 유지하는 제도임에도 여성들의 적극적인 조력에 의해 유지되어왔음은 아이러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내면화와 자기희생을 통해 유교적 가부장제의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족보〉처럼 이 점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적은 없다. 이 작품에는 전근대 여성들이 모성을 실천하는 경험적 상황과 제도적 모성의 양면성이라는 중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듯 윤석남이 그려낸 모성은 신비화나 예찬, 희생 일색의 모성 신화와 재현 전통에 대한 도전이요 뒤집기이며, 여성의 경험적 현실을 바탕으로 내재적 힘을 탐색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모성 신화의 힘이 워낙 강력한데다 체험적인 모성을 그린 미술의 전통이 희박한 상황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개발은 큰 부담과 어려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0년대 그녀가 주목받은 이유로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모성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재현하는가보다는, 작품의 주제가 어머니라는 점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96년 여성작가로는 처음으로 제8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되었을 당시 작가의 수상 소감을 들어보자. “기쁘면서도 다소 당혹스럽다. 이중섭 화백은 어려운 시절 가족의 끈끈한 정으로 휴머니티를 표현했다. 반면 나의 경우 가족의 문제점을 계속 제기해 어떤 면에선 가족 해체주의자로 오해될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주요 주제가 최근까지 ‘어머니’여서 가족애 주제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상을 수상하게 된 것 같다.”

작가의 우려처럼 어머니를 그린 작품들은 종종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나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강인한 ‘한국적 여인상’으로 단순화되어 가족, 어머니, 한국사라는 주제의 단체전에 소개되곤 했다.

이런 오해를 야기한 주된 이유로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 방법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들과 움직임이 최소화된 정적인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한복 차림이 과거의 인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의상은 항상 과거와 현재의 여성의 기표로 활용된다. 한복 차림의 어머니나 여성들의 모습은 양장을 한 현재의 나와는 다른 시간 속의 인물들, 즉 전근대나 근대의 표상이다. 작가에게 의상은 시공의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한 방법인데, 문제는 그 때문에 현실감과 개체성이 약해지며 현재의 나와 관계 짓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과거는 곧 전통이요 여성이란 비유가 작동하여 보편적 어머니상으로 흡수될 소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그녀의 작품에 그려진 여성들의 얼굴 표정과 나이는 각각 다르다. 뚜렷한 눈매와 강한 시선 처리 역시 거리감을 보완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나무의 표면을 다듬고 파내어, 거칠고 투박한 몸과 얼굴에 삶의 흔적을 배어나게 하고 독특한 질감을 살려내는 제작 과정 자체가 작가에게는 여성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화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바로 그 촉각성 때문에 작가는 아직 나무라는 재료를 놓지 못한다. 또한 재료의 수공적 처리 및 일정한 패턴이나 장식적인 문양들을 꼼꼼하게 그려 넣는 행위를 통해 수공예의 가치를 살려내 순수미술의 권위를 흔들고자 한 여성주의 미술의 전통을 계승한다.

수공예가 지닌 전복성에 대한 관심은 〈이제 크신 어머니께서 자고 깨니〉라는 공동 프로젝트 참여로 이어진다. 〈여성, 그 다름과 힘〉전의 전시장 내에 별도로 마련된 자궁의 방으로 통하는 입구에는 윤석남과 박영숙이 밤을 새며 한 땀씩 바느질해 완성한 성기 모양의 천이 드리워졌다. 윤석남은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가득 찬 그 사이 통로에 푸른색과 주홍색으로 물들인 소창을 길게 들어뜨려 질을 통과하는 시간을 여성의 성적 희열의 경험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런 작업은 몸 안을 직접 걸어다니는 경험을 통해 여성의 몸의 신비를 벗기려 한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과 여성 성기 도상을 이용해 여성의 몸의 긍정적 가치를 회복하려 한 미국의 여성주의 미술가 주디 시카고의 맥을 잇되 자궁의 긍정적 힘과 구체적 경험을 결합시킨 좋은 예가 된다.

그녀의 작업 방식에서 폐목뿐 아니라 빨래판, 의자, 창틀, 자개장 조각, 마네킹의 일부, 드럼통 등 주변에 버려진 생활 쓰레기를 수집하여 결합시키는 방법 또한 돋보인다. 못 쓰게 된 생활용품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다른 것으로 재활용해온 일반 여성들의 창의적 활동을 흔히 생활의 지혜라고 부른다. 미국의 여성주의 미술가 미리엄 샤피로는 이와 같이 수집과 재활용을 실천해온 여성들의 일상적 삶의 방식을 일찍이 예술로 승화시켜 ‘파마주(Femmage)’라고 명명한 바 있다. 주로 천으로 만든 사물이나 섬유를 활용한 샤피로와 달리, 다양한 사물의 입체적 결합을 의도한 윤석남의 작품은 여성적 아셈블라주란 뜻의 ‘팜므블라주(Femmeblage)’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석남이 샤피로의 작업 태도를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물건을 아껴 쓰고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가난한 성장기를 거치며 그녀의 몸에 밴 생활 습관이었다. 그것은 살 만해진 뒤에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길을 가다 못 쓰게 된 나무가 보이면 주워 오고 자신이 살던 아파트 지하실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진 생활 집기를 들고 왔다. 손때와 삶의 흔적이 담긴 오브제나 나무는 수공적 터치를 거치며 여성의 문화를 반추하는 작품으로 재탄생된다. 주워 온 창틀에 끼워 넣은 자화상, 의자 등받이에 끼워 넣은 여자의 얼굴 등은 예술과 일상, 예술 간의 경합이란 쟁점뿐만 아니라 감금과 탈출이란 심리 상태의 비유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녀의 나무 조각 및 설치 방법은 종종 베네수엘라 혈통의 미국 조각가 마리솔 에스코바의 작품과 비교되곤 한다. 실제로 작가는 〈태평양을 건너서〉의 미국 전시 때 〈족보〉를 본 한 미국 평론가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선 나무에 인물을 묘사하고 여성 모티브를 다룬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서구 작가의 작품과 비교될 때 국내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품이 모방으로 간주될까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윤석남은 마리솔을 일찍이 알고 있었고, 따라서 재료와 모티브의 유사성을 구태여 부정하기보다는 마리솔과 자신의 차이점에 주목해주기를 당부한다.

마리솔은 나무 몸통을 등신대 조각으로 잘라내어 채색하고, 석고로 만든 팔다리를 붙이거나 핸드백 같은 액세서리를 결합시킨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팝아트에 경도되었던 그녀는 1960년대 소비문화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미국 중산층 여성들의 지루한 삶의 일면을 팝아트의 세련되고 상업적인 미학과 결부시켜 표현했다. 기하학적 단순화, 매끈한 질감 처리, 중산층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 상업 미학을 중시한 태도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마리솔의 작품은 윤석남의 것과 달라도 많이 다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나를 돌아보며

윤석남의 작품은 1995년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는다. 10여 년이 넘게 몰두해온 어머니 주제가 〈어머니의 이야기〉(1995)란 작품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에 설치된 이 작품은 조각상들 앞에 수많은 촛불을 밝혀 멋진 피날레를 연출하였다. 촛불이 의례와 제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매개이듯, 어머니의 형상 앞에 켜진 촛불은 어머니의 삶을 기려온 그간의 작업이 끝났음을 고하는 것이었다. 촛불은 그 마지막 순간을 더욱 극적으로 비춰주었고, 윤석남은 그 이후로 촛불을 밝히지 않는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은 윤석남의 이야기의 대상은 자신과 역사 속 여성들로 향한다.

이후 시작된 자신의 이야기는 그녀의 작품 중 가장 격렬하고 고통스러우며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여성으로서 자아 정체성과 여성성에 몰입하며 악몽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야 했던 이 시기는 일종의 고행의 시간이자 재도약을 위한 통과 의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아와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발생한 치열한 갈등과 모순, 충돌은 의자, 무쇠 갈고리, 소파, 강렬한 핑크색의 모티브로 표상된다. 작은 나무 상자를 이용한 일기 형식을 통해서는 감금에 대한 불안과 탈출에 대한 욕망이 드러난다.

이때 그녀가 주목한 기물은 바로 의자였다. 1995년부터 등장하는 의자는 바로크풍을 모방해 당시 국내에 한창 유행했던 화려한 서양식 의자다. 그녀의 작품에서 의자는 중층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한국의 가정이란 공간에 파고든 서구 문화의 표상으로서 근대화 과정의 문화적 혼성의 기표이다. 사적 공간에 놓인 의자는 그곳에 기거하는 한국 여성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일상적 물질을 통한 서구 근대에 대한 욕망이 투사된 사물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여성의 몸의 은유를 들 수 있다.

송곳 같은 쇠다리 때문에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된 의자. 쿠션이 빠져 빈 의자. 쿠션 위로 날카로운 여러 개의 쇠갈고리들이 튀어나온 의자들은 〈낮과 밤〉(1995)에서 어느 시간에도 안락하게 거처할 자리가 없는 여성의 부재를 지시한다. 꿈틀 꿈틀 움직이게 고안된 의자의 갈고리들은 용틀임하는 여성의 내적 욕망의 파편들이다. 〈금지구역〉(1996)에서는 안과 밖의 경계를 위태롭게 지탱하는 현실과 욕망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의자〉(1995)와 〈거울보기〉(1997)에서 여자는 의자와 한 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의자는 민족정신의 은유가 덮어버린 여성의 욕망과 근대화의 물신적 가치가 충돌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에 시작된 〈핑크 룸〉 연작에서 의자의 의미는 더 복잡하게 전개된다. 네 점으로 구성된 〈핑크 룸〉 연작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화려하면서 무겁고 우리의 신경을 곧추세우게 만든다. 여성의 삶의 외연과 내연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현실과 심리의 복잡한 양상은 히스테릭한 형광 핑크색으로 제시된다.

꽃무늬가 박힌 형광 핑크빛 공단 천으로 씌우고 야광 띠를 칠한 서양식 의자와 바닥에 뿌려진 깨진 핑크 구슬들, 까치발로 서 있는 핑크빛 여자. 이렇게 〈핑크 소파〉가 연출하는 핑크의 현란함은 여성들의 박제된 삶의 공간이었던 그 방을 불안한 악몽의 현장으로 바꾸어놓는다. 일인용 소파가 삼인용 소파로 커질 때 관람자의 불편은 증폭된다. 의자 위로 솟구친 무시무시한 쇠갈고리들은 분출되는 여성의 욕망이고 히스테리적 발작이며, 가부장적 규범에 대한 위반이기에 더욱 더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한다.

역사 속 여성들과의 만남

형광 핑크를 통한 자아 반추의 고통스런 시간은 〈블루 룸〉의 청색 모티브와 〈빛의 파종〉 전시 등을 준비하며 점차 희망과 도전의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으로 1997년에 열린 이 전시에서 윤석남은 〈999〉를 발표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999개의 여성 소형 목상들은 각양각색이며, 같은 크기도 모양도 없고 똑같은 인물도 없다. 한복을 입은 전근대의 여성들, 얼굴이나 그 일부만 확대된 근대 여성들, 슬픔이나 사색에 잠긴 얼굴과 종종 웃음 띤 얼굴도 보인다. 작아서 구분은 잘 안 되지만 검은 눈동자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것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살다 간 수많은 여성 선조들이 집단 소환된 현장이다. 여기서 빛은 과거를 밝히고 이들의 몸을 자유롭게 분산시켜 파종하는 수단이다. 빛을 받은 개개의 인물상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차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작지만 다양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며 말을 건다.

그녀의 작품에서 수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데, 〈999〉가 그렇고 1,025마리의 유기견을 조각한 최근작이 그렇다. 천의 주변을 맴도는 두 숫자는 조각으로 제작하고 전시하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큰 수이며 완전한 수에 가깝다. 천에서 하나가 빠진 999개의 목상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완전에 대한 갈망과 기대로 가득하다. 그 불완전함은 한쪽 방에 별도로 설치된 하나의 여성 목상과 만남으로써 완성에 도달한다.

〈999〉는 여러 면에서 미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디너파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 규모나 제작 방법, 이름 붙이기 방식은 크게 다르나 과거의 여성들을 소환한다는 의도는 같다. 우연히도 〈디너파티〉의 바닥의 타일에도 999명의 여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디너파티〉가 서구 역사를 빛낸 여성들을 발굴하여 위대한 여성사의 재조명을 의도했다면, 〈999〉는 이름 없이 살다간 우리의 여성 선조들, 김씨·이씨·박씨 부인, 순자 엄마, 영자 엄마 등등을 불러내는 집단적 초혼 의식에 가깝다.

여성의 계보 탐구는 2000년대 들어 추상적인 여성 집단을 소환하는 방식을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인물의 묘사와 현대 여성과의 만남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늘어나다’ 또는 ‘역사 속 여성들과의 조우’라는 테마 아래 설치와 드로잉, 두 가지 매체를 통해 진행된다. 여성들의 몸의 일부가 길게 늘어나 마치 무언가 끌어내거나 누군가와 닿으려는 듯하는 형상이나, 물속을 유영하듯 자유로운 몸이 특징이다. 길게 늘어난 팔은 땅이나 하늘 또는 옆의 여성을 향한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과거와 현대의 여성들, 서로 다른 공간 속에 뿔뿔이 흩어져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 여성들 사이의 정신적, 감성적 접촉을 유도한다.

이런 점에서 비상의 모티브를 표현한 〈날개〉가 2005년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여성대회의 포스터로 선정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과거와 현재, 일상과 일탈이 겹치고, 다른 시공간을 사는 여성들이 손끝의 스파크로 연결될 때, 역사 속에 덮여버린 여성들의 이야기는 스멀스멀 벽을 뚫고 나와 수많은 속닥거림을 만들고, 공간은 점차 그들의 대화와 에너지로 채워진다.

〈늘어나다〉는 제명으로 2003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은 시각성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의 대화와 스침이 연출된 감각의 공간이었다. 길게 늘어난 팔들, 몸통, 나무나 열매에 박힌 긴 못들, 신체의 일부를 대신한 드럼통들은 촉각을 자극하고 물질성을 드러내 시각적 대상화를 거부한다. 조선시대의 여성시인 이매창과 작가의 만남을 묘사한 〈종소리〉(2002)에서는 두 여성의 손에 실제 푸른 종을 매달아 흔들 수 있게 함으로써 청각이 동원된다.

연으로 화한 허난설헌, 못이 박힌 심장을 빼 들고 있는 시인 김혜순, 교감을 나눠온 여성학자 김영옥, 고래를 머리에 인 물고기가 된 여자는 열리고 스며들고 미끄러지며 서로 맞닿으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다소 조심스런 만남의 시도는 2004년 이후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거나 직접적으로 신체를 접촉시키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전통 한옥마을로 지정된 영암의 구림마을을 배경으로 제작된 〈집: 문, 부엌, 방, 창, 벽, 기둥, 그리고 담〉(2004)에서는 금녀의 공간이던 회사정이란 마을 정자와 집 주변에서 과거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가 스며나온다. 황진이의 벽, 민며느리의 부엌, 마님의 안방 등 집은 조선시대 일곱 여성들의 삶과 고통, 좌절과 바람들이 투영되는 장소가 된다.

한 예로 〈나의 홍살문〉에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 넣었다. “시집도 가기 전에 청혼한 신랑이 급사했다. 시집가서 수절했다. 시댁, 친정, 양쪽 가문을 위해서 기꺼이 나를 버렸다. …… 내가 죽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다시는 이런 삶을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맹세하면서 눈을 감았다.” 조선 시대 정절의 상징인 홍살문이 지워버린 여성의 처절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목을 조일 것 같은 붉은 밧줄 이미지와 병치되는데, 여기서 여성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가 전달된다.

한편 미국의 이라크 공격 이후인 2004년, 이라크 현장 체험에 근거한 50여 점의 〈바그다드〉 드로잉 연작에서는 그녀의 관심사가 또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제3세계 여성들의 삶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돌봄의 윤리학의 실천

윤석남이 지난 5년간 매달려온 작업은 이제까지의 작업과 사뭇 달라 보인다. 우선 인물이 사라지고 1,025마리의 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2003년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고 있다는 이애신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접한 그녀는 놀람 반 호기심 반으로 동생과 딸을 대동하고 그 현장을 찾았다. 유기견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그 할머니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21세기의 화두인 돌봄의 윤리를 실천하는 삶, 그 자체였다.

버려진 생명체를 소중히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의 감동적인 모습을 본 윤석남은 그 믿을 수 없는 삶을 작품으로 옮기기 위한 밑그림 제작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3년 넘도록 건강한 개 3백여 마리를 포함해, 죽어 영혼을 남긴 개, 아픈 개 등 이애신 할머니가 당시 돌보던 개의 숫자대로 작품 〈1,025〉를 조각하며 거의 매일을 작업에 매달렸고, 올 여름에야 마지막 개 제작을 끝냈다. 그런데 원래 계획과 달리 정작 주인공인 할머니의 모습은 만들 수가 없었다. 하나의 인물상으로 형상화하기에는 그 돌봄의 폭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자르고 표면을 갈고 밑칠한 뒤 개의 형상을 그리고 마지막 손질을 하는 열두 번의 공정을 거치며, 작가는 1,025마리의 개를 탄생시키고 쓰다듬으며 대화를 나눴다. 불교에서는 천 일이란 시간은 나 중심의 시각을 버리고 타자의 위치에서 나를 보게 되는 시간이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몸도 변한다고 여긴다. 천 일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동안 실제로 그녀의 생각과 몸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우선 생명 있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 커가면서 점차 육식을 피하게 되고, 결국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종교가 없는 작가에게 그 시간은 상생의 가치와 잃어버린 영을 되찾는 여정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되찾은 어머니들, 의자가 된 여자들, 소파가 된 자신, 빛이 되어 곳곳으로 흩어진 여자들, 몸이 늘어난 여자들, 물고기가 된 여자들, 개가 되어버린 할머니. 이렇듯 윤석남의 작품에는 박제된 삶을 깨고 나와 점차 자유로워지는 여성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외부적 제도에 순응하거나 도전하고, 또는 스스로 좌절하거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 다양한 모습을 띤다.

그런 이미지들은 오늘의 나의 과거이며,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여러 타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윤석남은 과거와 현재의 여성들의 생애를 우리의 유산으로 되살려낸다. 현대미술이 대상화나 바라보기로 전락시킨 타자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을 주문한다. 그렇게 할 때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다른 나, 곧 타자들을 만나고 보듬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여성주의자들은 전쟁과 종교, 문화 사이의 충돌을 벗어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회복하는 것이 세계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과제이며, 그것을 위한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윤석남의 작품은 미술을 통해 바로 그와 같은 윤리적 지평을 열어왔으며, 최근의 작품은 그 가능성을 더욱 더 확장하고 있다.

여성주의 미술과 페미니즘의 갈 길이 아직도 멀다고 믿는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미술가란 평가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보다는 후배 여성 미술가들의 역할 모델로서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며, 더 많은 미술가들이 페미니즘의 실천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개인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더욱 더 힘을 발휘하고 있는 미술계에서 여성주의 미술이 확보할 수 있는 자리는 줄어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그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윤석남에게 미술은 곧 여성주의의 실천이요 자신의 삶이기에 다음에는 또 어떤 주제와 형식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 구상한다.

나이가 들어 미술계에서 자신의 위상이 위축될까 두려워 큰 소리를 치는 선배가 아니라, 보살핌의 윤리학을 몸소 실천하는 삶과 작품이 있기에 고희를 바라보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런 행보가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또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윤석남을 귀감으로 삼아 미술과 삶의 다양한 지평을 넓혀가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그녀의 작품과 삶의 태도가 여성주의 미술의 게토화를 뛰어넘어, 상생의 철학과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새로운 예술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Yun Suknam's Arts and the Story of Women - Kim Hyeonjoo
歷史を貫く 「女性の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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