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의 눈,·빛
백지숙 | 아르코미술관 관장
천불천탑(千佛千塔)과
천목녀상(千木女像)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 설화의 바로 그 장소, 전남 화순의 운주사는 소설 《장길산》에서 길산이 진도 등 전라도 해역의 섬들이나 나주 일대에서 일어난 노비들과 함께 도읍지가 바뀌는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장소 곧 역모의 땅으로 설정된다.
윤석남은 이번 개인전에서 천 명의 여인 목조상이 가득 들어차 ‘왁다글거리고 있는’ 설화적 공간 하나를 만들어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 전체 스펙터클의 규모가 우리의 눈을 잡아끈다. 그러나 곧바로 폐목의 자연색과 천연스런 선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표정 및 동작들이 그 목조상 각각을 응시하게끔 한다. 또한 춤을 추거나 기도를 하거나 유혹을 하거나 아니면 얼굴의 일부만을 드러내거나 하는 등의 몇 가지 유형으로 그들을 분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몸통에서 넘쳐나는 생동감은 그런 분류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들의 친근한 얼굴들과 익숙한 자세는 그 나무상들이 특정한 인물의 재현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무리 한가운데 서 있는 키 작은 여인들은 제각각 불상이자 장승이고 미륵이자 솟대이며 인형인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과 수호와 둔갑과 경계와 놀이의 그것으로 거기 서 있는 셈이다.
그들은 실패한 거대 기획의 한 요소로 그 공간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으나 자기 생명력을 갖고 있는, 그 자체로 각각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윤석남이 999명과는 별도로 한 명의 여인을 캄캄한 방에 안치해두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확연해진다.
잘 알려있다시피 불교에서 천(千)이라는 숫자는 만수(滿數) 또는 무량대수(無量無數)를 의미하며 “더 이상 채울 수 없이 가득 차 있다”는 상태의 표징으로 거론된다. 그렇게 꽉 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하나 즉 999명의 완결을 가져오는 그 하나는, 결국 나머지 999명 각각들로 얼마든지 대치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추상화된 구체로서의 하나이다.
이제 그런 하나들이 모여 있는 모습 전체는 이를테면 《만인보》와 유사한 일정한 서사성을 확보하게 된다. 한복이라는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네들과 드로잉으로 처리된 ‘모던한’ 반쪽 여인들의 혼재, 사방으로 줄지어서 뻗어 나가는 듯한 배열 방식 그리고 벽면에 길게 비친 마천루 같은 그들의 그림자가 그런 서사적 상상력을 돕는다. 게다가 꼬물거리고 있는 작은 그것들을 헤칠까 조심하면서 마치 소인국에 도착한 여행객처럼 서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까지 여기에 겹쳐지면, 그 설화는 당대의 살아 있는 우리와 일정한 연관을 맺게 된다.
그렇지만 이 공간이 갖는 서사적 특수성은 그것이 《만인보》의 울림과는 달리 어떤 위대함과 장엄함으로 우리를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곳은 오히려 일정한 정서적 통일성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그리하여 ‘대체 여자들이 모여서 무슨 작당들을 하는 거냐고 남자들이 야지를 놓는’ 이 공간에는 삶에 대한 기이한 낙관성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질투와 공모와 수다와 연대가 함께 떠돌고 있는 이곳은 “실패한 통한의 장소”와는 거리가 멀고, 제법 명랑하고 기운찬 미래까지 보장한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윤석남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독특한 ‘역모’의 내러티브들이다.
흉내 내기 또는 흔들리기
분명히 윤석남의 천목녀상들이 엮어내는 그 내러티브들은 “현대여성과 그들 어머니 세대간의 연결고리”를 인정하고 복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 의도는 이 공간에 김혜순의 시 〈딸을 낳던 기억〉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한 번 더 중첩된다. 여기에 한복 특유의 색상 및 그것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무늬들 그리고 이를 다듬어낸 수공적인 솜씨 등이 더해지면, 이 작품은 곧바로 그 유명한 퀼트의 여성주의적 함의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들만의 독특한 삶, 감성 그리고 망조직으로 구성된 정치학의 모양새”를 갖고 있는 바로 그 퀼트미학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은 인스톨레이션화된 퀼트이자 서 있는 보자기 조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 ‘퀼트’ 작품에 나타난 공예적 특징과 두드러진 장식성은, 으레 서구 페미니즘 미술사의 서장을 차지하곤 하는 이른바 소예술들(lesser arts)의 ‘공격적’ 정치학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몇 가지 내러티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든지 또는 그것을 연극적인 상황으로 재조직한다든지(〈핑크 소파〉 연작) 심지어 일러스트 조각에 가까운 작품들(〈일기〉)을 선보인다든지 하는 과정에서 읽혀지는 일련의 ‘예술의지’들은 윌리엄 모리스가 말한 “대중예술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예술이 소수 호사가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귀중품 즉 소통 불가능한 ‘타자화된 대상’에 그치는 것에 여전히 거부감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품들의 형식적 특징들은 단순히 그가 공예를 순수미술에 대립하는 것으로 그리고 여성적 감수성을 남성적인 제도에 반하는 것으로, ‘아방가르드적’ 설정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게 한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미리엄 샤피로의 경우에서처럼 그 장식성이 “노골적인 의미를 지닌 오브제들”로 부각되지 않으며, 루이스 코즐로프의 지하철역 설치미술에서처럼 대중적인 소통 영역이 별도로 확보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약간은 어설프게 마감된 문양들은 잘 만들어진 공예적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고, 반짝거리는 비단 소파는 대못으로 파괴되어 있으며, 화려한 색상의 신발도 신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겨냥하고 있는 공간 또한 물리적으로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그가 공예라는 장르의 컨벤션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흉내 내기’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켤레의 꽃신〉이라는 작품이 그 경로를 잘 드러내주는데, 작품의 표면에서 읽히는 내러티브와는 별도로, 이 작품은 순수미술과 공예의 역관계 및 그 뒤에 숨어 있는 특정한 성정치학을 모형화하고 있다. 상자 안에 모셔진 그림, 곧 재현된 담론 속의 이미지와 그 앞에 실물로 놓여진 신발 사이의 관계는, 막상 그 신발이 실제의 신발이 아니라 또 다른 의태(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헷갈리게 된다. 그는 공예가 아니라 공예처럼 보이는―그것을 흉내 낸―미술을 슬쩍 끼워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예 및 공예의 여성적 친화성은 본질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담론화 과정에 이미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것임을 지시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자신의 ‘예술의지’가 소미술/대미술, 여성/남성, 사/공의 그 대립영역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결과를 아직 알 수 없는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의 개성과 그가 속한 지역적 특수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족보’조차 계속 의심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버지들’에 역모하는 안티테제 역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반(反)이라기보다는 계속해서 연장되는 비(非)의 과정이라 하겠다. 이제 천 개의 목녀상들은 “아니다”, “아니다”라고 속삭이며 끊임없이 그 말을 릴레이한다.
천목녀상의 몸
그런데 이때 그렇게 속닥거리고 있는 그 여성들은 대체 어떤 ‘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상하게도 윤석남의 작업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여성상들은 하나같이 육체(flesh)가 탈락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 등장한 작가의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삶에 대한 열정”으로 자식들을 돌보지만 탯줄로 연결된 듯한 육체적인 친밀감은 결여되어 있다. 작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세 번째 개인전의 작품 〈낮과 밤〉에 등장하는 여인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마치 꿈속인 양 영혼이나 귀신에 가까운, 부피라곤 전혀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등장한 익명의 여인 천 명도 마찬가지다. 몸을 한복으로 가리거나 아예 몸통은 사라지고 반쪽의 얼굴만 남아 있는 이들에게서 몸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윤석남의 여성상이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 역사적인 의미 연관성이 더 높다는 손쉬운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육체의 탈락 과정에 동반되고 있는 어떤 시선의 문제이다. 우리, 여성은 타인을 바라볼 때 무엇보다 그 타인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응시는 곧 나르시시즘의 시선과 겹쳐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자기를 바라볼 때조차도 그 나르시시즘의 시선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납작한 나무들 위에 그려진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약간 옆으로 비켜서서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르시스의 신화―물 위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보고 이를 만지려다가 빠져 죽고 만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나르시시즘의 시선은 촉각을 극도로 자극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매만지지 않는가. 바로 그 나르시시즘의 시선과 비껴 서 있는 윤석남의 여성상은 여전히 그가 시각 우위적인 경계에 머물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그의 장식적인 여성상들은 촉감적인 감수성을 유도하긴 하지만, 결국은 딱딱한 나무를 직접 손으로 만지기 직전에 시선이 멈추게 한다. 이 차별성은 그와 유사하게 장식적인 것을 즐겨 다루며 여성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다른 여성작가들과 비교해볼 때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이불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기 이미지들은 푹신푹신한 재료들과 과장된 장식성으로 인해서 사람의 시선이 그 이미지에 곧장 달라붙게끔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이런 접촉성은 니키 드 생팔의 〈그녀(She)〉에 이르면 연극적으로 배가된다. 이제 관객들은 발랄하고 화사한 장식―외관을 뚫고 그녀의 질(膣)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다양한 쾌락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이렇다. 여성이 시각적 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촉각적인 쾌감의 대상임을 부각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동안 신비하고 어두운 대륙으로 여성을 묶어두려 했던 남성의 낭만적 신화를 벗겨내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만짐―여성적인 지각방식―으로써 알게 되는 것을 보려―남성적인 지각방식―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런 구별은 뤼스 이리가레이가 여성의 에로티시즘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명백해진다.
이리가레이는 시각을 통해 형태를 구별하고 개별화하는 일은 특히 여성의 에로티시즘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자기 애무적인 신체구조상 성적인 희열은 시각보다 촉각에서 더 많은 쾌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특징으로 인해 여성은 거리를 요구하는 시각과는 대조적으로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유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인접성, 그러니까 소유할 수 없는 타자와의 친밀성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시각계로 들어가는 것은 또다시 수동적인 존재로 즉 아름다운 대상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빛과 어둠 그리고 애무
그렇다면 자신의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시선의 결여를 그 특징으로 하는 윤석남의 여성상들, 여전히 시각계에 머물러 있는 그 여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로서는 촉각성과 시각성을 대립시켜 여성성을 반시각성(antivisuality)의 차원과 연계시키거나 아니면 궁극적으로 여성은 볼 수 없는 존재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거나 또 그도 아니면 ‘여성적 시선’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산출하거나 하는 등의 이론틀들이 이 문제를 푸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예의 윤석남 특유의 상황 만들기로 인하여 생겨나는 새로운 공간의 의미들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본다’라는 것의 의미 자체를 포괄적으로 설정해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단서가 마치 ‘계시’처럼 다가온다. 이를테면 윤석남의 작품은 밤의 공간에 박혀 있다. 여기서 밤은 필연적으로 낮으로 연계되는, 시간의 단선적인 흐름에 그치지 않는다. 〈핑크 소파〉의 형광빛 밤은 악몽의 이미지와 신경증적인 색채를 통해 통상적인 언어로는 의미화되지 않는 무의식의 체험들을 산출한다. 그러니까 이 밤의 무대 위에서는 일반적인 시간감의 기저를 형성하면서, 그 시간에 일종의 부피를 부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시간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부분적인 서광이 비치고 있는 〈999〉는 원생적(primordial)인 관념의 밤을 만들어내고 있다. 동서남북을 각기 상징하는 색옷을 입은 ‘동기(童妓)’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그 동굴은, 이제 어둠을 틈타 하나의 신화적인 공간으로 ‘둔갑’한다. 이 성역에서 밤은 우리 존재의 시작을 알리는 곳, 빛 너머의 공간에 닿아 있다.
밤과 낮을 지배하는 어둠과 빛이라는 모티브는 곧바로 우리를 인식의 문제로 이동하게 한다-그런 밤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빛은 시선을 통해 현상세계를 파악하게 해주는 하나의 미디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존재는 밝은 이성의 빛 아래서는 결코 온전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빛이 상실된 상태 즉 밤이 마련해주는 신비의 세계를 통해서, 도무지 정박되지 않고 떠도는 존재의 비밀이 ‘흘끗’ 보일 수 있는 것이다.(앞에서 말한 두 종류의 밤은 이 비밀들을 감추고 있다.) 이리가레이는 이러한 “밤의 현상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시선 대신 ‘애무(caress)’가 어떤 것을 알게(보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애무란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실제의 접촉이라기보다는 접촉의 제스처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 제스처는 움직임과 정지의 교대 과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다시 구성한다. 따라서 실제의 접촉은 계속해서 지연될 수밖에 없으며 촉감은 결코 획득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윤석남이 만들어낸 밤의 공간은 바로 그런 애무의 ‘실험장’이 돼준다. 어두컴컴한 곳에 즐비하게 서 있는 작은 나무들은 우리의 촉각적인 시선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시각적인 촉감을 멈추게 한다. 그러다가 부분적인 조명(illumination)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애니메이션은 낮의 감각들이 지배하는 공간을 초월하여 문득 새롭고도 경이로운 조우를 경험하게 한다. 육체를 넘어서는 그 계기를 통해 우리는 보지 않고 만질 수 있으며 만지지 않고 알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마치 바람이 나무를 스쳐 지나가면서 애무하듯이 우리는 ‘제3의 눈(All-seeing Eye)’으로 이 천녀목상들을 ‘본다’.
열정으로서의 빛
이때 우리의 나머지 두 눈을 다시 한 번 끌어당기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어둠을 관통하고 있는 조명-빛이다. 언뜻 이것은 동쪽에서 시작되는 새벽빛으로 운주사의 설화에 등장한 새벽과 동일한 시간대를 겨냥하는 듯 보인다. 그 운주사의 새벽은 기성의 권세가 지배하는 낮과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는 밤이 맞닿아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여기서 밤은 궁극적으로 이성과 신과 문화의 그 빛이 지배하는 낮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화 속의 천불천탑은 말 그대로 빛을 향해서 구부러진다는 향일성 또는 굴광성(屈光性)을 그 주된 특성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윤석남의 천목녀상들은 하나의 빛을 향해 고정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부분 조명들도 빛의 근원 자체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천이라는 수의 완벽성은 이 어둠이 낮과는 별도로 그 자체의 충일감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결국 이 경우의 빛은 태양중심주의의 그것과 달리, 생명의 시작과 물질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의 계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서광이라기보다는 한 줄기 섬광(spark)이다.
스파크, 빛과 어둠의 그 순간적인 접촉을 통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고 연이어 그것은 하나의 물질로 탄생한다. 결국 이 ‘감광성(photosensitivity)의 계보학’은 뛰어난 생식력을 밑바탕으로 다산에 관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윤석남의 작품에서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하나의 묘목이 솟아나며, 그 묘목은 다시 앞뒤로 새로운 생명을 파종한다. 그리고 그렇게 줄지어 솟아나고 있는 천 명의 여인들은 문제의 계보학이 철저하게 모계적인 것임을 주장한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모성을 현혹하고 있는 남성 성기 모양의 거석들 혹은 코가 베인-그 돌가루를 마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돌하르방들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서 있다.
일반적으로 다산성은 여성의 생물학적인 가임 능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그것의 사회적인 함의는 이 능력이 여성 자신에게 가장 원천적인 소외와 박탈의 근거가 되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생식력으로서의 빛은 그러한 성차의 불평등과 억압을 넘어선다. 차라리 그것은 앞에서 말한 삶에 대한 기이한 낙관성과 닮아 있고 생명을 향한 무한한 열정과 닿아 있다. 그러니까 그 열정으로 인해서 낳고 기르고 떠나보내는 일련의 힘든 과정들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새벽닭을 흉내 낸 가짜소리에 속아 넘어가 중도에 거사를 포기하는 일 따위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 그 열정은 결코 의심이나 회의의 대상이 아니며 철저하게 자기 몸속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자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열정이 어떤 안전과 평온함을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열정은 정착보다는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불안과 공포에 익숙해질 것을 요구한다. 대체로 한국사회에서 남성은 탄생에서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까지 일정한 장소에 붙박이 되어 있지만,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타향살이를 시작하며 죽어서조차 ‘그’ 집 귀신이 돼야 한다고 말해진다. 그런 맥락에서 〈낮과 밤〉 혹은 〈핑크 소파〉의 여인들이 밤에도 편안히 자지 못하고 위태롭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지혜로운 여인은 그런 불면의 밤을 버텨가면서 이 뿌리 뽑힌 삶을 정박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사실은 부질없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오히려 끊임없이 떠돎으로써만 삶의 활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운주사의 설화적 인물이 떠내려가는 배 모양의 땅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무거운 돌로 된 천불천탑을 세우려 했다면, 도리어 윤석남은 12개의 꽃신으로 익숙한 삶에 대한 포기를 ‘화려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생명의 파종
그렇기 때문에라도 윤석남은 천 명의 여인을 고이 간직하거나 한켠에 모셔두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기른 묘목을 오일장에 내다 팔듯이 그 하나하나를 여러 사람이 나눠 갖고 철저하게 ‘소비’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또 다른 타향에서 그 각각이 다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기를, 그리고 그를 보는 사람마다 자기 몸속에 그 생명의 빛을 잉태하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바로 윤석남의 작품을 통해서 명백해지는 감광성의 계보학의 실천이자 예술의 새끼치기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