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어머니…그 ‘심장’을 그리다

윤석남 작가가 올해 전시를 위해 제작한 설치작품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2015 세마 그린: 윤석남♥심장’ 전
‘여성미술’ 선구자 대규모 개인전
조선 거상 ‘김만덕 소재 최신작 등 50여점
서울시립미술관서 6월28일까지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은 좀 그렸다.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즐거웠고. 초등학교 때 막연히 화가가 될 거라 생각은 했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스물여덟 살 사랑이 전부인 줄 알고 결혼했다. 남들처럼 남편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의 일상을 살았다. 서른이 넘어서자 ‘내가 누군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란 의문이 생겼다.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우울증이 생겼다. 서른여섯 살 무렵 친구를 따라 박두진 시인 문하에서 서예를 배웠다. 하지만 서예도 답이 되지 않았다. 운명이 바뀐 날짜는 1979년 4월 25일. 정확히 기억했다. 친구 동생이 미대를 나왔다기에 하소연했다. “진짜 하고 싶은 게 그림인데 방법을 모르겠다.” 동생은 명쾌하게 한마디 했다. “그냥 하시면 돼요.” 그 길로 생활비를 털어 화방에 가서 붓과 물감 등 기본적인 화구를 샀다. 남편에게는 “그림을 그릴 자유를 주든지 이혼을 하자”고 통보했단다. 남편은 방 한 칸 헐어 작업실을 마련해줬다.
오는 6월 28일까지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2015 세마 그린: 윤석남♥심장’ 전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라 평가받는 윤석남(78) 작가의 1982년 초기작인 회화 ‘무제’부터 설치작품인 신작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까지 50여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자신이 쓴 글을 담은 160여점의 드로잉도 내놓아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전시에 앞서 만난 윤 작가는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가슴이 있는 대로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며 “작가로서 더 이상의 영광은 없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2013년 ‘김구림’ 전에 이은 한국 원로작가의 두 번째 회고전. 하지만 기존의 회고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신작이 있는 데다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겠다는 작가의 선언적인 작품에 무게 중심을 놓아서다.
윤 작가는 “지난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보니 회고전 형식보다는 앞으로 해야 할 작업에 관한 전시를 하자고 했고 미술관이 의사를 존중해줬다”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특히 조선 정조시대의 여성 거상인 김만덕에게 관심이 갔다”고 말했다. 이어 “서른아홉 살에 홀로 돼 6남매를 키운 친정어머니를 모델로 드로잉을 시작했다”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대상부터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작가로서 출발점을 되돌아봤다.

윤석남 작가의 1982년작 회화 ‘무제’. 친정어머니를 모델로 그렸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윤 작가가 그린 ‘어머니’는 당시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마치 소설가 박완서가 평범한 주부에서 마흔 살에 등단했듯 윤 작가는 1980년대 초반 화단에 범상치 않은 존재로 등장했다. 여성학자들과 교류하며 ‘여성의 삶’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인식하기 시작한 윤 작가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차별과 희생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평면회화가 아닌 버려진 나뭇조각을 활용한 조각, 설치작품 ‘화이트 룸: 어머니의 뜰’과 ‘사람과 사람 없이’ 등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창조했다. 최승희, 나혜석, 황진이, 이매창, 허난설헌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주제로 삼았다.
윤 작가는 “처음에는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몰랐다”며 “내가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을 그리자는 생각에서 친정어머니를 그렸고 이후 여성으로서의 내 삶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하게 됐다”고 귀띔했다. 덕분에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모성과 희생, 자연에 대한 경외, 생명에 대한 애정, 버려진 것들에 대한 연민 등 여성이 이 사회에서 강요받거나 감당하는 여러 상황을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환기하고 고민해볼 수 있다.
늦깎이로 시작해 반평생 여성주의 작가로 산 만큼 후배 여성작가들에 대한 생각도 각별했다. “후배들에게 ‘여성주의 미술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만 ‘여성인 내가 가장 잘 아는 문제가 무엇인지’ 깊이 파고들면 여성작가가 아니면 정말 할 수 없는 작업이 나올 거라 기대한다.”
전시기간 중 부대 행사로 관람객과 윤 작가가 직접 소통하는 ‘작가와의 대화’도 마련한다. 5월 9일 오후 2시 서울미술관본관 세마홀에서다. 02-2123-8937.

윤석남 작가가 설치작품 ‘허난설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김용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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