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관통하는 여성의 힘

역사를 관통하는 여성의 힘 
고카츠 레이코 | 도치기 현립미술관 학예과장

윤석남의 신작을 보기 위해 서울 남쪽의 수원에 있는 그녀의 작업실을 찾은 것은 8월 초의 맑은 날이었다. 작은 공장과 비슷한 넓이의 작업실에 지금까지 두 번 정도 온 적이 있다. 1층에 작업장이 있고 2층에는 갤러리와 같이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예전 작품에서 최신작까지 호응하거나 독립된 상태로 전시되어 윤석남의 작품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개인 미술관과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한 윤석남의 작업실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우리를 맞아준 것은 수많은 개, 개, 개의 집적이었다. 이전의 전시회에서 본 여성상은 벽 구석으로 물러나 있고, 그 밖의 공간은 모두 엄청난 수의 개 조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엄청난 수라고 썼지만, 정확히는 1,025마리라고 한다. 이 개 조각상들은 반지름 120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으로, 뒷면 구석에는 윤석남의 사인과 번호가 새겨진 명패가 부착되어 있어서 몇 번째 개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내가 작업실을 찾았을 때는 1,025마리 말고도 추가로 수십 마리가 더 있었는데, 윤석남은 최종적으로는 천오백 마리를 완성시킬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개의 조각상이라 해서 통째로 파서 만든 것은 아니다. 비슷한 두께의 직사각형 나무판을 자르고 다시 거기서 각각의 모양을 잘라내어, 그 표면에 물감으로 개의 얼굴이나 몸을 그려서 만들었다. 개 모양을 한 두꺼운 나무판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이나 폭은 개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실물의 개보다 큰 편이어서 커다란 것은 높이가 1미터를 넘었다. 작은 것은 30∼40센티미터나 될까 싶다. 

공통점은 거의 모든 개가 정면을 보고 있으며, 특히 표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몸의 일부가 생략되어 상반신만 있는 것도 있고, 얼굴이 강조된 것도 있다. 그리고 허를 찌르는 것은 늘어선 모든 개의 시선이 그들과 대면하고 있는 인간인 나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윤석남이 개의 눈동자를 위로 향하게 그려서, 그 결과 1,025마리의 개와 마주보고 있는 인간에게 일제히 시선이 쏠리도록 한 것이다. 

이 개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비호하고 명령하고 먹이를 주며 귀여워했던 주인, 즉 인간일 것이다. 애완견으로서 번식한 개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슬픈 듯하다. 지금이라도 끙, 하고 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그 이유는 윤석남이 원래 이 개들을 만들기로 생각한 동기에 기인한다.

2003년 5월부터 10월까지 일본의 가마쿠라 갤러리와 서울의 일민미술관에서 신작 개인전을 개최했을 때라고 한다. 그때까지 한국의 가부장제 역사 속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아온 어머니 세대의 여성을 주제로 삼았던 윤석남은 이 개인전에서, 자신을 비롯한 현대를 사는 여성상을 주제로 하여 그녀들이 상처나 무거운 짐을 안고서도 강하고 유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여 새로운 평가를 얻었다. 

이때 윤석남은 신문에서 어느 여성에 관한 기사를 보게 된다. 그녀는 서울 근교의 시골에서 버려진 개를 보호하며 길렀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녀가 사는 곳에 일부러 개를 버리러 가게 되어, 당시 그 수가 무려 1,025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몹시 끌린 윤석남은 개인전을 마치고 난 지 얼마 후에 실제로 그 여성의 집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1939년에 태어난 윤석남보다 두 살 많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특별한 점은 아무것도 없는 부인이었다. 커다란 개는 문 밖에 풀어서 기르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작은 컨테이너를 집 삼아 병에 걸린 약한 개들과 함께 침식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컨테이너의 벽은 얼핏 검게 보였는데, 알고 보니 무수한 파리 떼로 뒤덮여 있었다. 병에 걸린 개들의 체취가 파리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윤석남은 그런 이상한 환경 속에서 자기희생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가 무척 평범한 보통 사람인 데 특히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인간이나 동물, 다른 생물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짊어져온 행위이며 여성 고유의 힘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라고 윤석남은 생각했다. 개를 기르는 부인은 그러한 여성의 자애의 힘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 ‘여성의 힘’을 표현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윤석남은 그로부터 현재까지 5년간 개를 만드는 데 전념해왔다고 한다. 실제로 그 노부인이 기르고 있던 것과 같은 숫자인 1,025마리의 개를. 그녀의 생활이 보도된 후, 그 수는 더욱 늘어난 듯하다. 그러니 윤석남도 천오백 마리까지 만드는 것이리라.

이렇게 보면 윤석남의 신작인 개들은 단순히 개라는 속성을 넘어선 상징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번의 신작전에 전시될 1,025마리의 개를 설치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방대한 물량이 필요하다. 그 수많은 개의 존재 덕분에 더욱 또렷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그곳에는 없는 개들의 비호자, 바로 한 여성의 존재이리라. 그것은 현실의 한 여성을 넘어, 궁극의 자애심을 가지고 타자를,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들을 사심 없이 비호하고 감싸 안는 ‘여성’이라는 존재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윤석남이 ‘여성 고유의 힘’이라 생각하는 비호자로서의 능력은 남성이 여성에게 기대하는 일방적인 관대함이나 용서를 베푸는 그런 힘이 아니다. 

윤석남의 작가 이력을 되짚어 보자. 처음에 화가로 출발했던 그녀는 1985년, 당시 활발하게 활동했던 민중미술 조직 가운데 하나인 ‘민족미술협의회’의 여성 분과로 출범한 ‘여성미술연구회’ 회원이었다. 같은 해에 개최된 그룹전 때문에 그녀들은 ‘시월모임’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생활과 유리된 서양의 영향을 추종하는 모더니즘 미술에 반대하였으며, 그룹전 〈여성과 현실〉전(1987, 1988, 1992, 그림마당 민)을 연이어 개최했다. 여성미술연구회의 중심 멤버 중 한 사람인 김인순에 따르면, 당시 민족미술협의회의 활동은 오직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남북통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성미술연구회에 모인 여성 화가들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군사독재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가장 가혹한 길을 걸어온 여성들과 그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 제작에 전력을 다했다.

이 시기의 윤석남의 작품 〈손이 열이라도〉(1982)에는 아이를 두 팔에 안고 머리에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서 행상을 하는 강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성의 노동’이라는 주제는 다른 회원들과 공통된 것이지만, 그 표현은 리얼리즘을 넘어선 역동적이고 생생한 선과, 고된 현실을 날려버릴 듯한 유머로 독자성을 보여주었다. 그 여성의 원형은 윤석남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기도 하다.

이후 윤석남은 1990년대부터 공간을 구축하는 설치의 연극적 성격에 주목하며 조각에 의한 설치작업으로 전환한다.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 윤석남〉(1993, 금호미술관)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작품에는 ‘여성=어머니의 힘’이라는 주제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윤석남은 이 개인전에서부터 버려진 목재를 조립하여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고 조각하는 기법을 취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버려진 목재의 거친 옹이나 구멍, 검은 얼룩과 균열처럼 보통의 조각가들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결함을 그대로 살려서, 가부장제와 군부독재 하에서 이중으로 억압된 여성들의 마음의 고통과 제한된 행동 등을 표현하는 신체의 상처로 절묘하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윤석남은 이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에 신작을 더하여 1996년 2월부터 3월까지 일본 가마쿠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작품은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의 미술관 컬렉션에도 포함되기에 이른다. 크고 작은 여성 목상을 조합하여, 아들 낳기를 강요받는 여성들의 고뇌를 표현한 〈아들, 아들, 아들〉(1993, 미에 현립미술관)이나, 가계도를 배경으로 목을 맨 여성과 한복 차림에 굳은 얼굴로 앉은 젊은 여성이 있는 〈족보〉(1993,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그리고 벤치에 어깨를 기대고 앉은 3명의 할머니가 등장하는 〈벤치에서〉(1992, 도쿠시마 현립 근대미술관) 등이 그렇다. 필자가 적을 두고 있는 도치기 현립미술관도 2003년에 가마쿠라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인 〈연꽃〉(2002)을 소장품으로 구입한 바 있다.

1996년에는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한국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기획으로 〈90년대의 한국미술-등신대의 이야기〉(9월 25일∼11월 17일)를 개최했는데, 윤석남은 이 전시회에 신작 〈핑크 룸〉을 출품했다. 마루에 핑크빛 비즈를 촘촘히 깔고 갈고리가 튀어나온 소파와 의자에 동화된 여성, 나무판 모양의 여성을 배치한 설치는 2000년까지 이어지는 연작에 등장한다. 이전까지 어머니 세대 여성의 고뇌와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힘을 그려온 윤석남은 이 연작에서 자기 세대의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현대에도 어머니 세대와 마찬가지로 행동과 마음이 속박당하여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내면을 표현했다.

이 〈핑크 룸〉 연작에는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이 지닌 강인함이나 힘은 없고, 기이한 형광 핑크와 번쩍대는 나전의 목판과 새틴 천으로 표현된 옷이 보여주는 허영의 아름다움과 허무함이 드러난다. 바닥에 흩어진 비즈 때문에 비틀대거나 넘어지는 불안정함이 덧붙여져 오히려 여성 내면의 유약함과 광기에 이르는 고뇌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7년 11월, 서울의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최된 개인전 〈빛의 파종〉에서 윤석남의 기법과 주제는 다시금 커다란 전환을 보여준다. 여기서 발표된 신작 〈999〉는 제목 그대로 999개의 여성 목상을 설치한 작품이다. 그녀는 높이 30센티미터 정도의 땔감 같은 나무 기둥들을 빨강과 파랑, 녹색과 핑크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한복 차림의 여성 전신상을 선명한 색채로 그렸다. 작은 그녀들은 웃기도 하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하며, 그저 아무 일 없이 있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들은 조각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엔쿠(円空, 1632∼1695)가 만든 소박한 불상과도 닮아 있다. 한국의 절에도 이러한 목조 불상이 있는데, 마을의 경계에 서서 그곳을 지키는 장승과도 비슷하다 한다.

〈999〉에는 채색을 하지 않고 목재의 원색을 그대로 살린 바탕에 먹으로 여성의 얼굴 윤곽을 그린 기둥도 몇 개 섞여 있다. 이러한 얼굴의 여성상은, 현대 여성인데도 한복 차림의 역사적인 여성 군상 속에 놓임으로써, 윤석남의 주제인 현대 여성과 어머니 세대의 여성 사이에 시간을 초월한 끈을 가시화했다. 이 개인전 도록의 서문에서 평론가 백지숙은, 이처럼 세대를 넘어선 여성의 연결을 추구하는 윤석남의 표현이 페미니즘 의식으로부터 여성의 연대를 주창한, 여성들의 퀼트 공동 제작과도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남의 〈999〉를 조각과 설치로 이루어진 ‘퀼트’라고 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지숙에 의하면, 999는 천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이다. 천은 불교의 무량대수이자 충만한 상태라고 한다. 그 만수(滿數)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지막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된다. 그 하나는 다른 방에 전시되어, 999개 중의 어떤 하나와도 대체 가능하다. 즉 볼품없는 목상으로 표상된 여성 하나 하나가 이 세상을 충만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천 개의 여성상들은 갤러리에 전시된 후 따로따로 판매되어 말 그대로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세계로의 분포라는 이 행위가 개인전 제목인 〈빛의 파종〉과 대응하는 것이다. 이에는 각각의 여성상이 소유자들에게 인생의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또한 천 개의 조각으로부터 연상되는 것은 일본 불교미술 중에서도 헤이안 시대에서 에도 시대까지 전국에서 만들어진 천체불(千體佛)이다. 엔쿠도 반복해서 천체불을 만들었는데, 교토의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蓮華王院)의 천수관음상이 유명하다. 천체불은 불교에서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 중 현재의 겁에 나타나는 천체의 부처를 가리키는데, 조불주(造佛主, 옛 행정구역인 번(藩)의 번주나 승려)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한국의 불교조각에도 이러한 예가 있을까.

여기서 윤석남의 이번 신작 이야기로 돌아가자. 1,025마리의 개 설치는 10년 전의 설치인 〈999〉에 이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천체불에 담긴 기원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량대수인 천을 넘은 개들은 그 물량에서 한 여성이 보호한 엄청난 개의 숫자를 새삼 우리들에게 환기한다. 게다가 이 개들은 이전의 작은 목상 여성들과 비교할 때 실물보다 큰 크기와, 품종에 따라 달리 그려진 리얼한 표현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윤석남은 개의 도감 사진을 바탕으로 데생을 꼼꼼하게 반복했다고 한다. 미니어처 닥스훈트, 래브라도 레트리버, 비글, 달마시안, 보스턴 테리어, 도베르만, 스코티시 테리어, 불 테리어, 진돗개, 알래스칸 말라뮤트, 그레이하운드 등 도감을 장식한 한국의 인기 애완견들을. 하지만 윤석남이 그린 것은 단순히 도감에 실린 개들이 아니라 실제로 노부인이 보호하고 있던 개들이며, 전에는 애완견 가게에서 비싼 가격으로 팔렸으나 그 후 지나치게 자라거나 싫증이 났다는 이유로 버려진 개들인 것이다.

윤석남은 개들을 가능한 한 리얼하게 그리고 싶었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이는 지금까지 윤석남의 목조 여성상들이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표현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아마도 유기된 1,025마리 이상의 개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인간과 마찬가지로 개들의 생명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윤석남이 신작에서 개들을 돌보는 여성의 사심 없는 힘을 표현했다고 앞에서 썼지만, 생명체인 개들을 마치 쓰레기처럼 버리는 현대인의 이기심과 냉혹함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눈을 위로 치켜뜨고 인간을 바라보는 개들의 시선에는 애정을 거절당한 존재의 슬픔과 고독이 깃들여 있다. 이번 작품 중에는 심장부에 둥근 구멍이 뚫린 작은 개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가슴의 고통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1,025마리의 개들이 모두 리얼한 외모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실물과 같은 색의 리얼한 개들 외에, 흰색, 적갈색, 검은색의 세 가지 색으로 바탕색을 나누어 칠한 다음에 얼굴 표정의 윤곽만 굵은 선으로 그린 개들과, 전체 윤곽만 잘라낸 뒤 전면을 한결같이 녹색을 띤 회색으로 칠했을 뿐 아무런 얼굴 윤곽도 그리지 않은 그림자 같은 개들도 존재한다. 윤곽선만의 개들과 마지막의 ‘그림자 개’들은 나무토막의 옹이나 상처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윤석남의 여성상의 수법이다. 그 중 한 마리, 특히 상처와 얼룩이 심한 나무토막에 먹이 스며든 듯한 눈, 코, 입이 주어진 개가 필자에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모든 개의 슬픔이 응축된 듯한 가련한 개체.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이 개들 중 리얼한 개들과 윤곽선이나 그림자만으로 그린 개들이 1층과 2층 전시실에 나뉘어 전시된다고 한다. 필자는 현재 그 전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설치 작품으로서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전이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이 글을 써야 하는 답답함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자는 지금 윤석남이 만든 개들을 수원 작업실 옆의 풀밭에 설치하고 촬영한 사진을 보고 있다. 풀밭에 놓인 리얼한 개들의 군상은 과연 1,025마리의 개를 기르는 여성의 집의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리얼함이 있다. 윤석남의 〈1,025〉는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 공간과 인공적인 조명으로부터 벗어나 야외에 전시되어도 충분히 작품으로서의 강도를 유지하며 다르게 보일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윤석남의 작품이 화이트 큐브 공간의 보호를 받는 모더니즘 조각의 유약함을 가볍게 넘어서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장소’에 부여된 역사적 성격을 바탕으로 한 장소 특정적인 설치로서, 윤석남은 이미 여성에겐 금지된 마을 장로들의 집회소인 회사정과 그 주변에 과부, 어머니, 아홉 살에 팔려간 어린 신부, 자살한 여성 시인 등 일곱 명의 여성상을 배치해서 보여주었다. 필자가 2004년 9월에 방문했을 때, 버려진 나무로 만든 윤석남의 여성상들은 풍우에 시달리고 색이 바래서 회사정의 마루와 주변의 녹초에 동화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윤석남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가부장제하의 여성 억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띤 건축과 풍경 속에 여성의 몸을 일체화시켜서 거처를 마련해준다는 의미를 창출해냈다.

그렇다면 아르코미술관에서 시작된 1,025마리 이상의 개들은 앞으로 어떤 공간에 설치되어 작품으로서의 생명을 이어갈 것인가. 상상하는 즐거움은 끝이 없다. 어떠한 ‘장소’에 놓이든 윤석남의 개들은 현실의 버려진 개에 머물지 않고, 황금만능주의가 극에 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어 바로 버려지는 ‘말 못하는 약자’를 상징한다. 일본어에는 그런 사회의 낙오자를 가리키는 ‘마케이누(負け犬, 직역하면 경쟁 혹은 싸움에서 진 개라는 뜻―역주)’라는 좋지 않은 말이 있다. 그토록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약자들! 미국형 경쟁사회가 전 세계를 뒤덮는 부정적 세계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한국도 일본도 타인이나 다른 생물을 배려하고 너그럽게 대할 마음의 여유를 잃은 지 오래 되었다.

페미니즘으로부터 출발한 윤석남의 예술은 젠더의 차별에 대한 고발뿐 아니라, 여성의 자애의 힘에 대한 강한 신뢰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녀는 타자를 돌보고 배려하는 ‘여성의 힘’이야말로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를 수정하고 구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성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물론 ‘남성’도 역사적으로 여성이 짊어져온, 타자를 동정하고 돌보는 일로부터 면제되거나 배제되어 있지 않다. 

5년 동안 오로지 천 마리가 넘는 개들을 만들어온 윤석남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이야말로 이런 역사적인 ‘여성의’ 노동을 이어받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현대사회를 사는 이들에게 깊은 충격과 감명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신작 〈1,025〉야말로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자각한, 21세기의 진정한 ‘예술가’의 일이라 하겠다.

●박소현 옮김

The "Power of Women" Existing throughout History
Borderline Cases - Rebecca Jenn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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