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들의 공동체 :윤석남의 나무 – 개들 – 김영옥

손들의 공동체 :윤석남의 나무 – 개들
손들의 공동체 :
윤석남의 나무 – 개들

김영옥 _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1.”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불리고, 또 그렇게 삶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불리고, 또 그렇게 삶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 1993년 자신의 첫 전시회인 ⟪어머니의 눈⟫전을 열었을 때 윤석남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에 진력했던 미술사학자 지노 가오리를 기리는 추모 강연에서 윤석남은 당시 자신의 말을 회고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회고도 아니고 ‘거듭 확인’의 형태를 띤 자기 주문도 아니다. 이것은 ‘개 작업’ 전시회의 맥락과 관련해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페미니즘 문화운동에 던져주는 화두이기도 하다. 1,025마리와 108마리, 두 그룹의 나무 – 개를 전시해 관람객들을 놀라움과 긍휼 어린 심미적 경험으로 이끄는 이 여성 윤석남에게서,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겸손함과 오만을 닮은 담대함은 매우 미묘한 관계에 놓여 있다. 1,025마리의 개를 조형하겠다는 결심을 품은 뒤 5년 내내 은둔자가 되어 나무를 만나고 개를 기억하는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그 힘은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로 불림으로써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저는 미래를 믿습니다.”라던 1993년 당시의 고백에 이미 정초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누구의 혹은 무엇의 미래를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떤 미래를? 그녀는 물론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미래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 마리가 넘는 나무-개들과 함께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그 믿음의 서사적 넓이와 철학적 깊이를 증명하고 있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지닌 자기믿음과 직관이 새로운 세계관과 기호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공명하는 방식은 놀랍다.
현재 우리는 국내외에서 아트 경매장이 중요한 투자의 현장으로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고 ‘예술작품’이 좀 더 독특하고 독점적인 소비를 욕망하는 소비자들을 위해 명품과 함께 나란히 전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저당 잡힌 채 속도전을 치르도록 강요당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시대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바쳐 완성해낸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은 페미니스트 운동 전반을 성찰하고 페미니스트 아트에 대한 질문 자체를 새롭게 맥락화시킬 수 있는 뛰어난 계리를 마련해 준다. “아무리 예술을 하는 목적이랄까 형태가 변한다 해도, 겉으로는 변하겠지만 정말 저변에 있는 것, 밑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 같은 건 그렇게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어요. 꼭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5년, 10년이 뭐 길겠어요. 나는 10년 단위로 생각하는 게 버릇이 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그녀가 “꼭 해야 하겠다” 라고 마음을 정하게 된 (그것도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개-작업의 맥락은 무엇인가.

2.저 손들의 공동체:
윤리학과 미학 사이, 미학과 정치학 사이에 다리를 놓다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은 내게 있어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대 페미니즘의 운동 방향을 사유하게 만든다. 하나는 여성주의적 반자본주의 저항운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테크노문화 시대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존재론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들에 바탕을 둔 친족 네트워크의 구성에 대한 여성주의 담론(Donna J. Haraway, 2003)이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에 따르면 설계를 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농업의 방식과 광업의 방식이 그것이다. (멈페드, 1993) 파괴와 고갈, 단절과 불연속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채광 작업과 달리 농업의 경우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 희생되는 것, 파괴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창조의 과정에 합체된다. 여기서 죽음은 재생이나 부활의 형태로 지속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써 영원이라는 개념을 향해 나아간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의 손들은 농업적 설계와 창조의 뛰어난 전번들을 생산해왔다.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과 그녀를 번개처럼 강타했던 이애신의 유기견들과의 공생은 이러한 농업적 창조의 긴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라.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나무-개들 사이에는 두 여성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컨테이너에 살면서 천 마리가 넘는 버려진 개들을 돌보는 이애신이 있고, 일체의 외부활동을 접은 채 5년 동안 나무에 실림 이야기와 개의 버려진 경험이 ‘행복하게’ 만나도록 쉬지 않고 몸을 ‘쓴’ 윤석남이 있다. 이 두 여성은 쉼 없이 몸을 움직이고 손을 사용하여 밤이면 고단에 지쳐 기침을 쿨럭한다. 이들은 노동자다! 이애신의 ‘개 농장’이 결코 목가적 교훈담이 아니듯이 윤석남의 나무-개들은 결코 소비자본주의 사회 문화산업의 스켁터클이 될 수 없다. 이 개들은 하나하나 몸으로 보살펴지고 몸으로 ‘기억’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나무-개들’이 사진이나 소개의 글 혹은 그 어떤 뛰어난 비평의 매개도 거부하며, 사람들과 직접 몸으로 만나기를 호소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윤석남은 생산자로서의 작가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브레히트가 의미했던 것과는 달리 윤석남의 작업은 소비자본주의를 지워나가는 생산이다. 그녀의 두 손을 일회용 물품과 함께 생명 있는 존재들까지도 손쉽게 ‘쓰레기’로 내다버리는 소비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소비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소비를 통해 소멸될 수 없는 것, 절대 잉여적 불량품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되는 것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살수 없는 곳’에 세워지는 난민수용소가 보여주듯이 인간 또한 예외 없이 ‘쓰레기’가 되어 생물학적 생존과 사회학적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Zygmunt Bauman, 2005) 더러운 도시, 도시 빈민굴, 망명자 수용소, 제한 구역, 이주민 거주지역의 거주민들은 소비중심 자본주의 국가체계 내에서 생활세계의 안락하고 환영적인 폐쇄성 밖에 내몰린 채 ‘잉여 인간’이 되어 ‘헐벗은 삶bare life’을 살고 있다.(Giorgio Aganben, 2002) 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지난 몇 년간 버려진 개들은 많은 경우 깊은 생각 없이 연인들 사이에서 선물로 주고받은 것이거나 인터넷에서 번지는 유행에 편승해서 구매된 것들이었다. 변덕스러운 소비심리와 욕동affection의 결과 ‘버려진 개들’은 ‘잉여 인간들’과 나란히 동시대 소비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권력 체계가 그들로부터 박탈한 생명존엄을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다. 윤석남의 개-작업은 이 아우성에 대한 미학적 화답이다. 이 화답 속에서 미학은 윤리적 감수성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학의 무대에 등장한다.
길에 버려진 개들을 ‘거두어’ 돌보고, 그 개들을 다시 나무-개로 재현하는 이 전 과정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재)분배의 특정한 한 실천의 방식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 『구약성서』가 재현하는 유대교의 공동체에서 들판의 곡식은 항상 9/10만큼만 거둬들였다. 나머지 1/10은 남편이 없는 여성이나 나그네, 거지처럼 집이 없거나 집이 있더라고 경제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십일조를 신의 몫이라고 말한다. 남편 없는 여성이다 나그네, 거지가 바로 지상에 살고 있는 신인 것이다. 16세기의 프랑스 법전 역시 유사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 수확이 일단 끝나면 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 혜택 받지 못한 사람은 남겨진 것을 주워 갈 자격이 있다. 단 ‘일출부터 일몰 전까지만’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자본주의의 핵심원리인 욕심과 축적은 공동체의근간이 되는 공정한 (재)분배의 정신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이삭 줍는 사람과 나〉에서 ‘늙은’ 여성 감독 아네스 바르다는 반자본주의 운동(내지는 정신)의 어떤 원형적 이미지를 ‘이삭 줍는 여성들’에게서 발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논리에 따라 존재의 당위성과 가치를 부여받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농원에 남겨진 곡식이다 과일들, 혹은 새로운 소비를 향한 갈망 때문에 내던져진 ‘쓰레기’들을 향해 겸손히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후기자본주의의 소비-자유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줍는 것, ‘거두어’들이는 것은 자신들이 먹거나 쓰거나 예술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애신이 ‘거두어’들인 것은 버려진 개다. 이 줍는 행위는 앞으로 이어질 긴 과정의 시초에 불과하다. ‘거두어’들인 다음 그 개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함께 거주하며 돌봐야 한다. 이 경우 개들을 줍고 계속해서 돌보는 ‘손’은 한결 더 과격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저항할 뿐 아니라 친족문화에도 항거한다. 이애신이 돌보는 개들과 여기서 영감을 받아 윤석남이 만들어낸 나무-개들은 모두 개와 사람의 관계를 데카르트식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에 입각해 사유하는 기존의 시각을 거부하며 개와 사람이라는 상이한 종 사이의 새로운 공존, 새로운 친족 네트워크를 주장한다. 이애신의 개들을 보고 전율하며 “진정 원했던 주제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느낀 화가 윤석남의 이후의 개-작업은 이 새로운 친족 네트워크의 형성이 대단히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임을 잘 보여준다.
〈이삭 줍는 사람과 나〉에는 감독 자신의 손이 크게 클로즈업으로 잡힌 장면이 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다른 한손을 찍는 것은 정말 야릇한 느낌을 준다”고 말하며 굵고 작은 주름투성이의 손을 카메라에 담는다. 클로즈업으로 잡힌 그녀의 손등은 더 이상 사람의 손인지, 동물의 어느 신체 부위인지, 밭의 이랑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가 짐승 같아, 그것도 내가 알지 못하는”이라는 그녀의 독백은 자기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호기심과 해방적인 즐거움마저 감도는 발견의 미학을 담고 있다. 평생 카메라를 들고 이미지와 감동을 줍기에 열심이었던 그녀의 손은 이 영화에서 이삭을 품고 있는 밭이랑인 동시에 그 이삭을 줍는 손이며, 동시에 모든 생명체의 생존의 기억에 동참하고 있는 어느 동물의 신체 부위이기도 하다. 다중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 손은 이분법적인 경계 짓기 속에서 사유되어 왔던 자연과 문화를 내파시키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자연문화natureculture에 대한 감수성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만든다. 이 손은 여성 아티스트의 작업에 대한 살이며 또한 기호이다. 열정에 들떠 나무-개를 만들어나가는 윤석남의 손 또한 그 위로 겹쳐진다.

이 여성들의 손은 들판에 남겨진 곡식을 아무런 수치심이나 눈치 봄 없이 줍는 사람들의 손이나, ‘곳간’을 갖지 못한 경제적 소수자들의 손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 손들 위로 가축을 돌보던 개들과 양떼를 몰던 개들, 거리의 방랑자와 함께 추운 겨울과 여름을 나던 저 모든 개들의 시선이 머문다.

3.개와 함께 산다는 것은

윤석남의 나무-개들은 인간 삶의 은유/유추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은유/유추이기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동물을 통한 은유는 인간 생활에서 빈번히 상투어로 사용된다. ‘개 같은 인생’처럼 때로 그 의미가 분명한 경우도 있고 ‘어느 집 개가 짖냐’처럼 개의 발화를 인간의 언어와는 달리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못된 것은 개만도 못하다’에서처럼 개와의 관계에 약간의 신뢰나 기치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과의 관계보다 낮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의 인본주의가 당연시되는 한 기분 내키는 대로, 유행이 시키는 대로 ‘애완동물’을 집에 들였다가 또 기분 내키는 대로 유기하는 것은 정해진 결과일 것이다. 때문에 동물 비유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인간과 같으면서 동시에 다른, 그래서 여전히 모호한 존재로 남아 있는 동물들은 인산이 자신의 기원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줄곧 인간과 동행해왔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근접성은 이 둘의 관계가 은유적이 되는 것을 허용했고, 가장 오래된 문학 장르 중의 하나인 동물 우화는 이러한 전통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동물 우화에서 가장 뚜렷한 형태를 발견했던 동물의 인격화는 그러나 19세기 이후 문제적인 것이 되어왔다. 19세기에 이르러 동물원은 제국주의적 권력과 정복 욕망의 상징으로 등장했고, 이후 디즈니의 예가 보여주듯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동물을 각종 가족 관련 상품으로 전환시켰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사라졌던 동물은 ‘애완동물’의 형태로 사람들의 소비적 삶 속에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처럼 달라진 맥락 속에서 동물의 인격화는 복잡하게 얽힌 정신적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원형적 ‘천진함’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그로써 인간과 동물, 두 종 모두의 자율성을 침해하기 십상이다.(John Berger, 2000) ‘애완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이들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데 몰두한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신화는 인간의 소비주의적 변덕, 즉 ‘욕동의 경제학economy of affection’에 뿌리내리고 있다. 개를 향한 인간의 욕동이 시들해질 경우, 또는 기대했던 조건 없는 사랑을 주지 않을 경우 개들은 버려진다.(Donna J. Haraway, 2003) 근대 이후 번성했던 낭만적 사랑의 각본이 반복적으로 읊조렸던 ‘조건 없는 사랑’은 이제 후기 근대 삶 속에서 환멸만을 안겨주는 인간세계를 떠나 ‘애완동물의 능력’으로 전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살면서 만들어내는 사회성은 부상하는 자연문화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로 우리를 초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들이 단순히 사유의 동반자가 아니라 삶의 동반자라는 것이다. 동물과 함께 사는 것을 동물과 인간 두 종 모두에게 가장 공정하고, 두 종 모두의 자율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설며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문화적 결정론 모두를 넘어서는 진화론적 설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설명에 따르면 함께 거주하는 인간과 동물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환경이 되어주면서 서로의 존재를 구성하고 함께 진화해나간다. 인간과 개, 혹은 다른 동물들이 함께 거주하며 사는 일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가로지르며 시도되는 ‘소통’과, 의미 있는 타자성 속에서의 관계 맺기(Donna J. Haraway, 2003) 과정이다. 이러한 관계 맺기 방식은 페미니즘이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개발해온 것이다. 함께 거주하는 동물에 대한 개념을 애완동물pet에서 반려동물companion animal, 그리고 더 나아가 반려종companion species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따라서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띤다.

의미 있는 타자성 속에서의 관계 맺기에 대한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은 인격성을 띤 개들의 존재감을 놀라운 목소리로 전한다. 그리고 윤석남의 개-나무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의 중요한 전범이 될 것이다.

“사실 얼마나 헤맸겠어요. 나무를 잘라서 개의 느낌이 나게 한다는 게.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한 것은… 갈고 다시 칠하고 갈고 다시 또 칠하고 그걸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물질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개의 피부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이 개는 분명 나무잖아요. 내가 나무로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대화가 된다는 느낌이 오는 거예요. 마지막에 눈동자를 탁 찍으면, 이 개가 확 나를 향해 달려오는 거예요. 그럼.’그래, 그래 너….’ 하면서….
그러면서 개라는 것이 굉장히 젠틀하다는 느낌이 들고. 인간보다 더 깊은 거 같아요. 비유컨대, 살아 있는 개 한 마리, 한 마리가 굉장히 우아하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렇게 그녀에게 나무-개는 그 피부가 느껴지고 그 인격성이 감지되는 대화의 상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의 일 년 동안 개를 드로잉하면서 그녀는 개의 해부학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개들은 그녀의 손끝과 오른쪽 뇌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실체가 되었다. 처음 만든 200여 마리의 개들은 아직 ‘개’가 되지 못한 그냥 개였다. 아니 그냥 나무였다. 그러나 그녀의 수없는 드로잉은 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과정이었고, 그 타자성 속에서 개들/’개’를 만나는 과정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윤석남의 나무-개는 현상이면서 개념이다. ‘피부’를 지닌 개별적 기이면서 보편적 ‘개’이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애신이 돌보는 1,025마리의 개를 보았을 때 그녀를 강타했던 그 놀라움과 깨달음(“인간의 본래적인 어떤 부분이 손상되었다”), 비극과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는 그 전율을(“1,025마리의 개를 돌보는 이 여자의 무심한 태도라니”) 동시대인들이 느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예술의 사회적 정치적 힘은 “사회가 흘러가면서 불순물을 거를 수 있는 체’의 역할에 있으며, 이 걸러짐을 통해 사람들이 생을 향해 긍정의 웃음을 띠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그래도 뭔가 희망이 있구나… 예술이 주는 꿈이라고나 할까… 가슴이 울렁울렁해지면서 아, 그래, 정말 좋구나, 그래, 이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라는 지경까지 가게 하는 거. 사회적인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아도, 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영양분을 제시하는 그걸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관람객의 가슴이 울렁울렁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나무-개 1,025마리를 형상화해야 했다. 그녀는 1,025마리가 만일 스펙터클의 아무라aura를 띤다면 그것은 놀라움을 통한 인식의 전환을 위한 것이지, 일시적이고 표피적인 소비로서의 흥분을 위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잠시 촉발되었다가 사라지는 측은지심을 위해서가 아니다. 깊은 연민과 변화에 대한 의지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거의 종교심에 가까운 어떤 열망 같은 것을 작품에 쏟아부었는데, 결국은 그냥 보여주는 게 다지, 첫날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부터 일할 때의 그 열기와 열망이 다 사라지는 걸 봤어요. 결국은… 사람들이 버려진 개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 정도에 불과한 거야. 더 깊은 게 안 보이는 거야. 사실 나는 단순히 버려진 개를 모아둔 게 아니고, 현대문명이 만들어준 인간의 모습, 그 유형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데. 모든 게 나를 위해 존재하고, 타인에 대한 사랑 같은 건 우스꽝스러운 게 되어버리는 거, 삶이 너무 나 중심으로 리얼해지는 거. 내면 깊숙이까지 참, 천박하다고나 할까, 그 안에는 여성성이다 우정 같은 게 개입되지 못하고 오로지 나의 이익에 천착하는 것, 모든 면에서.”

4.이 모든 것이 개 작업을 하면서 일어났어요”
– 미감은 실감의 차원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윤석남-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전시회를 마친 후 그녀는 다시 108마리의 나무-개들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만 해도 존재를 박탈당한 개들, 부재하는 개들은 눈이 없었다. 그러나 전시회를 ‘겪으면서’ 그녀는 “이제 내게는 눈이 없는 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라고 고백하는 어떤 새로운 의식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부재하는 개들에게도 눈이 있어야 해요” – 다시 눈을 되찾은 ‘존재 없는’ 개들은 환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화려한 꽃들을 등에 달거나 곁에 두고 있다. ‘108’이라는 숫자는 분명 불교에서의 백팔번뇌를 가리키고 있다. 그녀는 개들이 이제 해탈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글쎄요, 의례가 필요했던 거겠죠” 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와 연관해 나는 아르코에서 전시하는 도중 그녀가 어떤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버려진 개들의 고통과 아픔을 표현하기보다 작가로서의 내 욕망이 더 앞섰던 것은 아닌가 미안해진다” 라던.
이제 새로 작업한 108마리의 개들을 보면서 나는 손쉽게 해탈이나 구원을 말하기보다 오히려 그녀 스스로 한 번 더 나무-개 프로젝트의 저 ‘첫 장면’으로 돌아가 미학과 윤리학이 처해 있는 힘든 현실을, 버려지는 ‘잉여인간/잉여 생명체’에 대해 무감각해진 동시대인들의 고단하고 거친 삶을 고민해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나무-개를 만들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고 변신했으므로. 그녀는 ‘임금같이 걷고, 임금 같은 위엄’을 지녔던, ‘무지무지… 무지무지…. 덩어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꼬옥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으로 늘 설레게 했던 그녀의 반려개 ‘새벽이’를 잃어버렸다. 개는 버려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개 사냥꾼’에게 붙잡혀 소위 사철탕집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곳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새벽이의 자유를 존중했던 그녀는 ‘동정 없는 세상’이 주는 잔혹한 교훈을 몸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채식주의는 정치적인 행동이더라구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지독하게 섬세해진 생명 감수성 때문에 스스로 당혹스러워하기도 한다. 이제 그녀의 예술 작업은 그녀의 실생활과 마구 뒤섞여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이 개 작업을 하면서 일어났어요” – 나는 이 말에 감동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학이 전시장을 떠나, 윤리적 ‘강령’을 떠나, 정치적 ‘선언’을 떠나 미세한 경험의 차원에서, 일상의 실감의 차원에서 미감으로 번지고 있음을 느끼기에.

윤석남이 믿고 있는 페미니즘의 미래, 그리고 페미니스트 아트의 미래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에 대한 환영幻影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은 이 시점에 윤석남의 작업은 페미니스트 아트의 의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떤 형식원칙과 진리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놀랍도록 단호하고 놀랍도록 부드럽게 질문하고 있다. 형식부여를 통해 작품 내부에 간직하게 된 ‘미학적 차원’이 바로 ‘해방적 계기’로서의 예술의 특질이라는 마르쿠제의 오래된 명제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향해 해방되어야 하는지, 그 해방을 위해 어떤 감수성을 되살려내야 하는지, 한국 페미니스트 아트의 대모라는 ‘명칭’을 극구 사양하는 윤석남이 나무-개들 앞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참고문헌
루이스 멈퍼드(1993), 『歷史 속의 都市: 그 기원, 변형과 전망』, 김영기 옮김, 서울 : 明寶文化社 ; Lewis Mumford(1961), The city in History: Its Origins, its Transformations, and its Prospects, Penguin.
존 버거(2000), 『본다는 것의 의미』, 박범수 옮김, 서울: 동문선; John Berger(1992), Abour Looking, Vintage.
Agnes Varda(2000), 〈The Gleaner and I〉.
Donna Haraway(2003), 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 : Dongs, People, and Significant Otherness, Chicago : Prickly Paradigm Press.
Giorgio Agamben(2002), Homo sacer: die souveraene Macht und das nackte Leben, ueber. aus dem Italienischen von Hubert Thuring, Frankfurt am Main : Suhrkamp.
Zygmunt Bauman(2005), Verworfenes Leben: Die Ausgegrenzten der Moderne, Hamburger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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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 - 조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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