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 – 108
김홍남 _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불교에서는 사람이 108가지의 번뇌를 갖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번뇌를 안고 살고 있는 셈이다. 백팔번뇌百八煩惱는 고苦로 함축된다. 석가모니가 대각大覺 직후 녹야원에서 한 척 법문法問인 제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즉 四聖諦)는 괴로움에 관한 진리 고제苦諦, 괴로움의 원인에 관한 진리 집제集諦, 괴로움을 없앰의 진리 멸제滅諦,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관한 진리 도제道諦이다. 석가모니 또한 대각에 들기 전 엄청난 번뇌를 거쳤다. 따라서 불교는 고苦에서 출발하고 고苦를 해결하는 법을 찾고자 시작된 종교임에 분명하다. 사람은 불론 일체의 살아 있는 것이 처하는 고苦의 원인이 욕망慾望이며 욕망을 끊어야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멸滅의 진리이다. 멸滅은 고苦에서의 해탈, 즉 열반涅槃이다.
그러나, 욕망, 그것은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도 하나의 욕망이고 그 욕망이 없었으면 부처도 불교도 없었을 것이며, 인류를 죄에서 구하고자 한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와 십자가가 있었기에 기독교도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108의 번뇌 중에는 이렇게 숭고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번뇌도 들어 있다. 이 번뇌를 거치면서 바르게 보는 마음을 키우고, 바른 일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석가모니가 설법한 팔정도의 정관正觀과 정업正業이 아니겠는가?
범인의 번뇌가 108가지라면 예술가의 번뇌는 몇 가지나 더 추가될까? 예술가는 특별한 욕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먼저 자신의 번뇌를 스스로 관조하고, 정관의 과정을 거친 후, 그 결과를 표현하기 위한 자기만의 조형 어휘를 찾아야만 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그 길만이 구원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타자와 공유하고,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예술의 역사에 남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욕망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미학적인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열반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며, 번뇌와 깨달음을 하나로 하여 내면에서 삭이고 살아갈 운명의 인간군상이 아닐까? 깨달음을 얻었으나 중생을 위해 열반하지 않는 세속의 보살Bodhisattva처럼….
백팔번뇌가 108알의 염주와 108번의 종울림(백팔종)으로 표현되어온 것은 익히 알지만, 108마리 개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처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생명체 중, 유독 개는 인간의 오랜 친구로, 정말 생각도 많고 또 마음씀씀이도 깊다. 개와 생활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습들, 성격들, 주인과 개가 닮아가는 모습들, 그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보면서, 이 우주가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이놈이 나의 전신, 내 부모의 후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윤회samsara에 대한 회의를 걷어버리게 된다. 윤석남의 작품, 백팔번뇌는, 인간을 넘어 동물,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나와 하나로 보는 그의 깨달음, 즉 정관正觀을 실천하고자 하는 구도의 한 행위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