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 – 조혜정

모성, 역사 그리고 여성의 자기진술
조혜정 | 연세대 사회과학대 교수

저항을 오직 조직화된 형태에서 찾음으로써, 나는 여성들이 자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저항의 가능성을 간과해왔다.
-린 필링스, 《라틴 아메리카의 농촌여성》 중에서

딸이 어머니를 잃은 것, 어머니가 딸을 잃은 것, 이것이 여성들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비극이다.
-에이드리엔 리치, 《Of Woman Born》 중에서

페미니즘: 여성해방과 여성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근대 서구’라는 특수한 토양에서 생긴 단어이다. 이는 이른바 자유와 평등을 향한 근대적 인간해방 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성들에 의한 적극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리에게는 가부장제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부부유별’과 ‘남존여비’라는 강력한 단어가 중세사를 통해 있어왔고 근대사상이 싹트면서 ‘부녀해방’이라는 단어가 주어졌었다. 최근에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우리는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고 특히 문학이나 미술 등 예술 영역에서 여성이 부각되면서 ‘여성주의’라는 단어와 자주 만나고 있다.
페미니즘이란 여성해방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시각 또는 이론 체계를 말하는 것인데, 엄밀하게 보면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피해자 집단에 의한 권리투쟁이라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철학으로서의 성격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들이 만들어왔으나 그동안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여성적 문화’ 내지 ‘여성 의식’의 차원을 의미한다. 대개의 경우 전자는 ‘여성해방’이라는 단어로, 후자는 ‘여성주의’라는 단어로 번역하면 자연스럽게 읽힌다.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이 두 차원은 사실상 함께 가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종종 갈등을 빚어왔다. 이른바 ‘여성적인 것’이 여성해방 운동의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 여성해방 운동은 ‘여성적인 것’으로부터 탈출을 기도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린다 고든의 표현을 빌리면 ‘여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여성 자신이며, 여성의 몸이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여성의 경험이다. 그것은 여자로 살아가는 ‘자연스런’ 경험의 총체인 것이다. 그 가운데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덧칠된 부분, 이른바 ‘허위의식’적인 것도 들어 있다.
반면에 여자로 살아가는 ‘자연스런’ 경험의 분출이 아닌, 여성 주체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체험의 영역이 있다. 이는 새로운 정치적 해석과 투쟁을 수반하는 여성해방적 전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경우에 따라 ‘여성적인’ 것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의식이 투철한 남성과 가부장제에 잘 적응해온 여성을 두고 어느 쪽이 더 변혁적 잠재성을 지니는지를 묻는다면 ‘여성적 경험’을 중시하는 편에서는 단연 ‘가부장적’ 여성 쪽을 택할 것이고 정치적 의식을 중시하는 편에서는 성과 무관하게 해방적 전망을 가진 쪽을 택할 것이다. 남녀분리주의에 대한 입장도 실은 이 ‘경험’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적 문화’, ‘여성주의’, ‘여성 의식’, ‘여성적 감수성’, 또는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규정해나가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란 사실을 감지한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되고 만들어져야 할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눈에 보이는 제도권 권리 쟁취에 몰두해온 경향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시기가 지나치게 길어지면서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상당히 편협하게―엘리트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적으로―규정된 ‘민중’의 모습을 재현해내는 데 급급하여 ‘여성적인 것’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여성해방’을 주제로 하였다는 작품전에 가보아도 ‘남성적’ 이미지와 강력한 인과론적 메시지 그리고 타자를 압도하는 단일한 ‘통합적 주체’의 목소리가 전시장을 채우는 경우가 잦았다. 화면에 그려진 여성은 옷과 머리 모양이 다를 뿐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곤 했다.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성뿐 아니라 남녀 간의 차이성도 무시된 채 한 ‘전형적’ 노동자로서의 모습만 그려져 있기도 했다. 현대사회의 가부장적 억압과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복잡한 연관성을 위계서열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또는 “타도하자”의 구호에 감정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정작의 주인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범한 경우가 많았다.
‘타도’에 열을 올릴 때, 우리는 타도의 대상, 그 지배체제의 틀 속에 갇히게 된다. 그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눌리고 삐뚤어진 자신들을 바로 세워가기 위한 새로운 언어공간을 자체 내에 ‘만들어가는 것’, 피해자의 시각을 넘어서서 대안적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것, ‘지배문화에 의해 타자화된 자신’이 아닌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존재,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여성이 자기의 주변적 삶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되고 그 주변적 삶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타자화된 자신들의 삶 속에 아직 숨을 할딱이고 있는, 심한 금지와 금열 가운데서도 명맥을 이어온 꿈, 어머니와 할머니, 그 윗대 할머니 대대로 내려온 어떤 드러나지 않은 욕망을 찾아내야만 여성들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여기 이 땅에서 그런 여정을 떠난, 아직은 매우 드문 일을 하는 한 미술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는 무엇인가에 끌려서 길을 떠났다. 여성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전 〈반에서 하나로〉에서 그가 그린 것은 썩은 보석 사이의 벌거벗고 앉아 있는 여자, 손이 여섯 개라도 모자라는 어머니, 그리고 일하는 건강한 여자들이었다. 그 이후에 페미니스트 시인들과 함께한 전시회 〈우리 봇물을 트자〉에서 그는 ‘모성’과 ‘자매애’를 그려내 보였다.
〈우리 봇물을 트자〉를 준비하면서 그는 인문사회과학이나 다른 창작 분야에서 일해온 페미니스트들과 본격적으로 어울리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여성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 일하는 데 익숙한, 그런 면에서는 여전히 ‘전형적’인 그림쟁이의 틀에 머무르고 있던 그에게 “혼자서 계속 작업을 할 것이냐?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냐?”는 그들의 다그침은 당황스런 것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소극성을 반성하면서 ‘과연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그는 자신의 세계를 보다 넓게 열어가려고 애썼다. 그 후 1년 반 동안 그는 외국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 많은 깨달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자기만의 방’이 있었으므로? 일상에서 떠났으므로? 젊은 미술가들과 밀접하게 어울리면서 자신을 돌아볼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므로?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온 지 1, 2년이 된 그는 어느새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가 다룬 ‘모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니, 그가 다룬 ‘모성’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뭔가에 이끌려서 여정을 떠난 다른 많은 여성들이 다른 장르를 통해 말해온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그가 지금 가고 있는 여정의 시대적 의미를 조명해보려고 한다. 그의 여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새로운 역사쓰기의 길 떠남’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학에 나타난 모성

제도로서의 모성과 체험으로서의 모성

‘모성’이 기존의 병든 문명을 치유할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이미 19세기 말경부터 있어왔다. 그런 주장은 만인평등의 사회가 실현되리라는 꿈이 끔찍한 세계대전으로 무참하게 깨지면서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여성은 ‘모성적, 협동적, 평화적’ 덕목을 갖춘 존재이므로 여성들이 힘을 모으면 비인간적인 사회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동조자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16년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더욱 더 페미니스트가 되어가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이 반역적인 남성들의 연극(전쟁) 속에 또 하루를 보내야 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활기찬 젊은 여성들이 선두가 되어 여성들을 한데 모아 전쟁을 끝장낼 때가 되지 않았는지!

울프는 여기서 당시 유럽사회의 광기와 결함을 치유하기 위해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울프의 외침이 더욱 실감나는 방향으로 진행해가고 있고, 흥미롭게도 이러한 주장은 진보계와 보수계에서 동시에 일고 있다.
사실상 여성들이 모성성을 발휘하여 사회를 치유하자는 주장은 생명을 우습게 아는 지금 시대에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적 사회에서 ‘모성’의 찬양은 여성을 주변에 묶어두는 주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부계혈통사회에서 제도화된 모성은 여성들로 하여금 아들을 선호하게 만들었고, 그 극단적 사례를 우리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텔레비전 연속극 〈아들과 딸〉에서 보고 있다.
부계중심사회에서 모성이 남성 중심의 사회를 존속해가는 제도로 고착되어 사실상 여성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분리되고 오히려 그 체험을 왜곡해온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온 에이드리엔 리치는 가부장제사회에서의 모성적 경험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가 없이는 어떠한 여성도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생각을 잠시 들어보자.

나는 이브의 저주와 같은 주술적 사고와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희생을 재생산해내는 과정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허구적 모습을 고찰하지 않고서는, 미래에 대한 어떠한 이상도 투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리치는 특히 모성이 지닌 양면성에 주목하는데, 하나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모성은 고통과 박탈감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도 모성적 경험이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양면성을 모성의 ‘경험적 측면’과 ‘제도적 측면’으로 나눔으로써 리치는 가부장제 아래서 어머니의 역할이 지닌 문제와 그러한 모성적 연계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모성의 경험이 지닌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나는 모성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가지 의미를 분리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현재는 하나의 의미가 다른 하나에 덧붙여져 있는 상태이다. 모성의 한 가지 측면은 잠재적 관계이다. 이것은 어떤 여성이든 출산을 할 수 있고 자녀를 기를 수 있는 능력(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뜻한다. 모성의 또 다른 측면은 제도이다. 이것은 모성의 잠재성이 남성의 통제 아래 계속 머무르게 하는 목적을 가진 제도를 뜻한다.
리치는 여성의 노예화의 기초가 되었던 것은 단순한 출산 능력이 아니라 여성 위에 군림하려는 남성들의 정치경제적 권력 체계와 출산 과정의 통합 체계임을 밝히고, 법률적 강제수단과 자발적 동의를 유발하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이 체계가 무너져야 ‘체험으로서의 모성’이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리치가 이 글을 쓸 당시 서구의 여성해방 운동가들은 ‘모성’에 대한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고 출산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치가 하고 싶었던 말은 모성적 제도를 파괴한다고 해서 모성을 전면 거부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리치는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가해지는 극도의 가부장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성들 스스로가 모성이라는 경험을 지금까지 계속해올 수 있었던 점에 경탄하면서 동료 페미니스트들이 이 점에 주목해주기를 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모성제도가 파괴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여성들은 자식을 위해서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려 애썼다는 점이다. 부드러움, 열정, 본능에 대한 믿음, 불타는 용기,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보다 깊은 자기발견을 촉구한다. 리치는 모성이 전적으로 제도에 의해 형성되거나 통제된 것은 아니며, 그 속에 남성의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 것이다. 모성 안에 풍부한 창조성과 기쁨의 잠재력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녀관계의 기본 축이 ‘부부’인 서양과는 달리 모자관계가 중심이 되는 우리사회의 경우 ‘모성’의 문제는 좀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리치가 제시한 모성의 ‘제도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의 구분은 우리 현상을 이야기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위에서 논의한 점에 유의하면서 최근 우리 여성 문학계에서 일고 있는 ‘모성’에 관한 형상화를 따라가보도록 하자.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여성해방 문학가 고정희 등이 펴낸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 여성해방 시 모음》에 실린 것들로 최소한 여성해방적인 전망에서 씌어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개개 작가들이 가진 구체적인 방법론은 다를지라도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진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적 가치로서의 모성

모성을 다룬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모성’을 새로운 시대적 가치로 부각시킨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구체적 경험과 관계로서의 모성을 그린 경우이다. 먼저 어머니의 이미지를 그린 작품을 읽어보자. 따로 책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시집을 가리킨다.

당신이 꽃을 아름답게 피운 것만이 아닙니다.
햇빛과 바람 속에 피어나
가지마다 휘어진 꽃이
당신을 곱게 치장했고
당신이 열매를 소중하게 키웠으되
스스로 자신을 채운 열매로 당신은
몇 갑절 찬란했습니다.
숲과 가을이 깊었습니다.
고운 잎과 농익은 열매
선선히 보내시고
허공에 벗은 가지 드러내소서
당신 삶의 참 뜻 보이소서
찬 하늘에 명징하게 새겨진 고독
비로소 치장 없이 자유로운
뿌리 튼튼한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이성애, 〈엄마나무〉, 49쪽

이 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어머니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인고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약간 비껴나 있다. 그 어머니는 고독할 줄 아는 어머니이다. 그래서 자유롭고 뿌리가 튼튼한 영혼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말해온 어머니의 이미지와는 차이를 보인다. 가부장제 아래서 어머니는 자식에게 집착한다. 생존과 권력이 자식에게 달려 있으므로……. 시인은 ‘혼자 설 줄 아는 어머니’, ‘자식을 떠나보낼 줄 아는 어머니’에 대한 흠모를 이 시를 통해 그려내 보이고 있다.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이런 어머니들이 계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소유의 화신과 같은 분들이 계시다. 그들은 절대로 혼자 서려 하지 않으며 자식을 떠나보냄으로써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모른다. 이 시는 ‘자유로운’ 어머니를 그리면서 ‘집착적인’ 어머니를 지우려 한다.
고정희가 읊은 어머니 역시 새로운 이미지를 담고 있다.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을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은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 〈어머니, 나의 어머니〉, 132쪽

이 시에 나타난 어머니 역시 집착적인 어머니이기보다는 초월적인 어머니이다.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종말과 개벽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이 어머니는 “하나님을 낳으신, 만건곤 강물의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강은교는 좀 더 잔잔하게 역시 비슷한 영상을 “이름 모르는 꽃”이라는 제목으로 노래한 바 있다.

이름 모르는 꽃이 저 뒤 들판에 앉아 있네
앉아서 향기론 바람 부르네
이름 모르는 풀은 이름 모르는 풀과 함께
이름 모르는 새는 이름 모르는 새와 함께
알몸의 돌과 함께 흙과 함께

이름 모르는 꽃은 그리고 가는 모든 길들의
그림자를 쓰다듬어주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악수하게 하네
별에게 제 살에서 쉬라고 하네
그 들판이 어디?
그 별 쉬는 곳이 어디?
사람은 들판으로 가는 길을 찾아
먼 눈을 씻고 또 씻네

이름 모르는 꽃이 저 뒤 들판에 앉아 있네
향기론 뿌리 깊이 누운 곳
알몸의 흙들 평화로이 사는 곳

이름 모르는 꽃은 이제 길이네
이제 바다네
이제 바람이네
수천 년의 햇빛이네.
-강은교, 〈이름 모르는 꽃〉, 117쪽

강은교는 이 시에서 역사의 뒤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와도 어울리고 관계를 이어주며 자족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이름 없는 꽃이었던 존재가 시대의 희망이 되는 세상이 오고 있음을 전한다. “제 살을 떼어서 생명을 살리는” 어머니는 이렇게 이 시대의 보루로서 여성작가들에게 인지되고 있다. 그러한 어머니를 ‘민중’의 대명사로 더욱 승화시킨 고정희의 또 다른 시를 읽어보자.

어머니
더는 잠드실 수 없나보군요
흙탕물 질펀한 유세마당에
적막한 주름살로 서 계시는
어머니
이천 년도 더 짓밟히신 어머니
열 손가락 피 깨물면서도
개과천선 그날을
못 버리시다니
하녀노릇 옥살이 지겹지도 않나요
몸 팔아 자손들 먹여 살리시느라
다국적 사창가 전전하면서
육천 마디마디 쇠바늘 꽂아놓고
긴긴 날궂이 버티신 지난 날
누구를 그다지도 기다리셨나요
점찍으신 자손들은 옥문이나 드나들고
보필하신 자손들은 객사귀신 되어
구천의 하늘이나 떠돌고 있는데
경천애민 그날을
못 버리시다니
어머니
그날은 꼭 올까요
어머니의 백일 금식
효험이 있을까요
오늘은 당신의 12대 회갑잔치,
남은 자손들 얼기설기 모여 앉아
유례없는 말잔치
유례없는 공수표로
한 상 떡 벌어지게 ‘먹자판’ 벌여놓고
‘만수무강 하사이다’ 기원축수 드리니
뼛골에 사무치는 시장기 감추시고
망연자실 펄럭이는, 펄럭이는
어머니.
-고정희, 〈프라하의 봄-12대를 곡함〉, 34쪽

우리는 이 시에서 자신이 원하는 질서의 세계를 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본다. 그러면서도 선뜻 혁명을 기도하지 못하는 어머니, 개과천선 그날을 기다리며 ‘적막한 주름살로 서’ 있는, ‘망연자실 펄럭이며’ 그만 자취를 감추어버릴 듯한 어머니를 본다. 그 어머니는 마냥 그렇게 버티기만 할 것인가? 이제 벼랑 끝까지 밀려난 어머니를 어찌할 것인가?
소설가 박완서는 단편 〈해산바가지〉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이 소설은 “아들이고 딸이고 둘까지만 낳아보고 그만 낳을 테니 그런 줄 아세요”라고 시어머니 앞에서 “감히 그런 발칙한 소리를 한” 며느리가 괘씸하고 분해서 미칠 지경인 어느 동창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성적인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배운 것 있고 부족한 것 없이 사는 그 친구는 “초음파 검사니 아들 딸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겁 없이 “딸년을 덜컥 낳아놓은” 며느리가 시집을 우습게 본다고 흥분한다. 소설 속의 화자는 그녀의 모습에서 모성이 실종된 세상을 본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소리를 들어보자.

“그는 지적인 호기심이 결여된 분이었지만 자기 나름의 확고한 사랑 법을 가지고 있었다.”
“천금 같은 손자 똥을 남이 더러워하고 찡그리게 하느냐고 스스로 기저귀를 빨았고.”
“그분의 자장가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착하고 무구한 아기가 되어 너그럽고 큰 손에 안겨 온갖 시름과 악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한 편안함에 잠기곤 했다.”
“외아들을 둔 과부인 그가 네 명의 손녀를 줄줄이 보았어도 며느리에게 싫은 내색을 안 보였고 그의 엄숙한 해산 준비와 해산한 후의 의식은 손녀라 해서 조금도 생략되거나 소홀해지지 않았다.”
“잘생기고 여물게 굳고 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를 해산바가지로 쓰기 위해 특별히 주문하고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비는 진지한 기도는 엄마가 될 황홀한 기쁨과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착하게 자라리라는 확신”을 주는 의례였다.
그는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기억하는 어머니들이 멸종되고 있음을 본다. 지금의 문명처럼 많은 사람들을 모성의 체험으로부터 소외시킨 시대가 또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시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현대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재생산’이 위기에 처한 데서 오는 것이다. ‘엄숙한 해산 준비와 경건한 생명존중 의례’를 알고 있는 실종 위기에 있는 ‘어머니들’을 우리는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나는 모성이란 실은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의 기본적 정서이며 그것은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무력한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누군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 동안 체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릴 적의 ‘체험으로의 모성’은 어른이 된 다음 다시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체험을 통해 되돌려지고 되살려진다. 이 시대에 남성들이 위험한 것은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체험으로서의 모성’을 덜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 시대에 이 시대 전체가 위험한 것은 여성들까지 그 성향을 급격하게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자와 여자 모두가 모성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관계로서의 모성과 모성의 재생산

그러면 어떻게 모성의 재생산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먼저 아직도 굳건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부장적 제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모성에 대한 언설을 지워가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작업으로서, 여성 자신이 스스로 체험한 모성을 말하기 시작하는 일이다. 여성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직접 체험한 모성, 그 복잡한 관계를 말하기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굳어진 ‘모성’의 껍질을 깨고 자신의 경험 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를 살려내고 다시 만들어가는 것, 이 작업을 통해 각자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수많은 다른 어머니들을 해방시켜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그 윗대 어머니로부터 이어져온 관계의 끈을 잇는 것과 통해 있다.
실제 현실에서 어머니와 모성은 하나의 이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아픔과 갈등을 딸들에게 물려주었다. 김승희는 가부장제가 파놓은 함정, 그 박제된 모성에 화살을 던진다.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주세요.
한국 전래동화 속의 착한 엄마들처럼
참, 아니,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이 험한 세상
엄마마저, 엄마마저…… 난 어떻게……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도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이 험한 세상
당신마저, 당신마저…… 난 어떻게……
여자는 액자가 되어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액자 속의 가훈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도매금으로 넋을 팔아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도배되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 하나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애매하게 매달려 있다.
……
-김승희, 〈성녀와 마녀 사이〉, 98쪽

용서의 미소인지 포기의 미소인지 배신의 미소인지 알 수 없는 그 미소 속에 감추어진 모나리자의 미소를 김승희는 새롭게 읽어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들의 꿈으로는 미화될 수 없는 마녀의 부엌 같은 뜨거운 화산’을 그 미소에서 읽어낸다. 고생의 화신과 같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진 딸들에게 어머니는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존재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체험된 모성은 이상적 가치이기 전에 항거해야 할 무엇임을 이 딸들은 느끼고 있다. 어머니/할머니를 눈물과 고통 속에서 기억하는 시를 읽어보자.

할머니 눈 밑 깊은 주름살 속
長江처럼 흐르던 눈물
어머니 무명 옷고름 촉촉이 적시고도 흘러
밤마다 나의 배갯잇 흥건히 고였어요
할머니 소리 없는 울음
가슴속엔 천둥우뢰가 울고
어머니 내색하지 않는 아픔
대못 박힌 가슴속엔 피멍이 들어
난 차라리 절구통에 쿵쿵 이마를 찧었어요
……
-차정미, 〈어머니의 가슴〉, 54쪽

이 시에 나타난 것처럼 근세사를 살았던 어머니들은 종종 ‘억압’과 ‘희생’의 대명사 같은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그 억압을 공유하다 못해 “절구통에 쿵쿵 이마를 찧고 싶은” 딸에게 어머니는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지 결코 다가가고 싶은 대상은 아닌 것이다. 어머니는 ‘귀남’이들의 마음의 고향이었지 ‘후남’이의 마음의 고향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머니를 시대의 희생물로 보는 시각은 자칫 연민의 정으로 이어지면서 몰역사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근대사에 고난의 화신처럼 살았던 어머니가 이제 아파트에서 편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새 시대를 만난 것이 아니듯이, 모성을 둘러싼 복합적이고 미묘한 관계는 겉옷을 갈아입었을 뿐이지 그 뿌리를 그대로 가부장제의 토양에 굳건히 박고 있다. 모성을 무시하는 세상으로 갈수록 모성으로서의 여성과 개성으로서의 여성의 갈등은 보다 첨예하게 드러날 것이고, 어쩌면 바로 이 갈등 속에서 모성에 대한 언설의 장이 아주 새롭게 열려갈 것도 같다. 그러한 갈등을 드러내는 시를 읽어보자.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어진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 밤 꿈에도 분명 살아 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 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舞姬처럼
창공을 박차는 새의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 못하는 구나,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김승희, 〈엄마의 발〉, 16∼17쪽

이 시대 어머니는 딸들에게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사회화시킨 장본인이며, 딸들은 그것에 대한 분노를 마음 깊이 가지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머니는 딸들에게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라고 말함으로써 김승희는 어머니와 여자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종종 서로를 억압하는 갈등 관계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비슷한 선상에서 자신의 엄마 됨을 성찰하는 시가 있다.

……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 데다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신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김혜순, 〈엄마〉,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중에서

어머니가 된 사람들 중에는 마음 깊이 죄의식을 느낀 때가 많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부과된 엄마의 ‘행세’에 부담을 느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구체적인 경험으로서의 모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러 모습의 어머니를 이야기하게 되고 여러 모습의 관계를 보게 된다. 아직까지 어머니에 대한 문학 내 언설은 위에서 본 두 가지 차원(시대적 가치로서의 모성과 도망가고 싶은 억압으로서의 모성)에 주로 국한되어 있지만, 색다른 소리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김혜순과 정화진의 시는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고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고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려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 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김혜순, 〈딸을 낳던 날의 기억-판소리 사설조로〉, 126쪽

김혜순은 이 시에서 혼자 겪어야 하는 경험이자, 모든 생명의 탄생을 원하는 자들이 겪었던 출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진통을 하는 가운데 그는 어머니들을 만났는데, 그 어머니들은 대모신도 아니고 그냥 젖 달라 외치는 생명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진통을 덜어주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는 혼자서 바닷속까지 자맥질을 하고 죽었다 깨어나서야 비로소 새 생명을 낳는다. 자기 어머니인 딸을 낳는다.
여기서 김혜순은 여성은 스스로가 자신의 어머니이면서 자신의 아이이고 딸인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쌍방적인 관계이며, 모녀 관계가 모자 관계와 다른 것은 바로 이 차이에서일 것이다. 여성은 자신 속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 시에는 출산을 둘러싼 신성화도, 모성에 대한 미화도 없이 그냥 여자들로 이어지는 끈이 살려져 있다. 이 시인은 부계 혈통적 계율이 지배하는 자리를 지나쳐버린다. 그는 그러한 존재에 상관없이 자기가 딸을 낳던 날을 쓴다. 아버지를 내쫓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없다. 단지 여자들이 엎치락뒤치락 자유롭게 움직여 다니는(어머니였으면서도 어머니답지 않게 장난치고 젖을 달라고도 하는) 공간이 있고, 그 무대는 여자들, 여자들에 대한 기억들을 되찾기 위해 비워져 있다.

정화진이 그리는 모성은 또 다른 모습이다.

근암댁이 대청마루에 새벽 안개 한 사발을 담아둔다.
안개와 섞이며 사발 속에 익모초즙이 출렁이고
신열이 난다. 안방에서 앓는 아이
벼랑으로 내달리는 아이의 병을 긁어대는 근암댁
안개 한줌을 더 부벼 사발 속에 넣으며,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한다 얘야.
-정화진, 〈나의 방은 익모초 즙이 담긴 사발이다〉,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중에서
이 시에는 앓는 아이를 고치려는 대모신이 등장한다. 그는 약을 만들기 위해 “안개 한줌을 부벼” 넣기도 하는 무속적이고 신화적인 존재이다. 김혜순은 “정화진의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시적 화자의 할머니이면서 또한 사제적 신유의 능력을 갖춘 대모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인 시적 화자는 안의 세계, 여인들만의 원 안에 머물고 밖의 세계를 공포 속에서 느낀다. 그는 상상의 세계 안에서 상징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고 빙빙 돈다. 상상계 안에서만 자유로운 여성, 밖의 세계로의 진입을 꺼려하는 여성, 대모신의 품안에서만 자유로운 여성은 앞으로의 시 쓰기에 많은 억압을 받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김혜순은 이 시인이 대모신의 품안에서만 안주해버릴까봐 염려한다. 그 손길을 벗어나 아버지의 법세계를 만났을 때를 상정해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크게 당황할 것이다. 그러나 대모신의 비법을 찾아가는 여행 중에 일어나는 은밀한 변화는 아버지의 법질서와 맞대면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이 아닐까?

윤석남의 어머니 그리기

문학에서 모성의 논의는 여기까지 와 있다. 어머니들이 실은 누구보다 적극적인 가부장제의 버팀목이 되어온 묘한 구조를 지닌 우리 사회에서 모성에 대한 논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많은 것이 풀려나와야 하고 많은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미술계에서는 최근까지 여성들의 체험을 풀어가는 움직임이 미약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윤석남에 의해 미술 영역에서 모성담론에 관한 언설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윤석남은 마음 깊이 ‘존경할 수 있는’ 어머니를 가진 ‘행운’의 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런 일은 드물다. 그는 어머니를 그리면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어머니를 그린다. 윤석남의 어머니는 청교도적인 정직함과 지혜로움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이 어머니와 자신이 맺어온 관계,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는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세상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딸에게는 “손해를 보지 말라”고 이른다고 했다. “할머니를 닮으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세태가 세태인 만큼 어쩔 수 없다면서 그는 자신이 가진 모성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고 “건강한 어머니를 그렸다”고 누가 말하면 듣기가 싫다고 한다. 지금은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여성사를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래서 일제시대, 해방, 6·25의 분위기와 양재동 시장에 가시는 요즘의 어머니까지를 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림으로써 눌려 살아온 모든 여성들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포부를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해낸 어머니의 삶의 형상화가 얼마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신경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지 말기를! 모성의 체험은 매우 다양하다.
어머니를 그림으로 그리던 그는 어머니를 나무에다 새기기 시작했다. 평면이 싫어지더라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의 작업이 지루하고 부담스럽고 어딘지 어색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꼬무락 꼬무락거리면서 만드는 것이 하고 싶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나무에 그린다 했다. 우리 어머니들이 꼬무락거리면서 하던 일을 그는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얻어온 나무를 들여다보다가 최소한의 손질을 해서 표정을 집어넣을 때, 그래서 엄마가 보일 때, 기쁘다고 했다. ‘최소한의 손질’, 여성적인 것과 통하는 데가 있는 방식일 것이다. 색채로는 절의 단청이나 나무 상여에 붙어 있는 장식들, 무당집에 가면 느껴지는 색들에 손이 가더라고 했다. 원초적이라고들 하는 색인데 왜 끌리는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대모신의 비법을 따르고 싶은 것은 아닌지?
자신을 찾아, 여성성을 찾아 길 떠난 윤석남은 지금 위에서 논의한 여성 문학인들이 서성이는 언저리 어딘가에서 탐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는 페미니스트 작가답게 갈수록 실험적이 되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모성이 앞으로 어떤 모습, 어떤 양식으로 나타날 것인지, 어떤 매체를 통해 드러날 것인지, 또 어머니와 딸의 연결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혹 그가 그러한 연결을 이루어내지 못하여 어머니 그리기를 이번 전시회를 끝으로 그만둘지라도 나는 그가 계속 자신에 대해서 그릴 것이고 여성에 대해서 쓸 것을 알고 있다. 제도로서의 모성의 장막을 걷고 체험으로서의 모성을 살려내고자 하는 그는 여성인 자신에게 즐거울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은 쉽게 붕괴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활동이 눈에 띠게 늘어나고 여성해방운동이 가시화되면서 구세력의 공략은 오히려 교묘하고 강해지고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를 활용하여 여성들을 더욱 단단하게 가부장제에 매어두려는 언설이 새로운 여성적 가치를 부각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과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어중간하게 모성을 포장한 형태인 ‘여류적 감성’은 문화예술계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고, 학교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가르치는 기본 덕목은 여전히 제도화된 모성에 초점이 놓여 있다. 일반 조직사회에서 강조해온 서비스 정신으로서의 ‘모성성의 발휘’는 여전히 여성들의 몫이다. ‘모성’을 주제로 한 페미니스트의 여정이 어렵고 복잡한 길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치 상태인 두 반목적 세력이 ‘모성’이라는 한 단어로 진지를 마련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계와 연극계 그리고 영화계에서 모성에 대한 언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으면 한다. 그것은 여성이 자신을 쓰는 데서, 여성이 여성을 듣는 데서 시작될 작업이다. 엘렌 식수가 표현했듯이 여성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되어왔던 것처럼 말하기로부터도 배제당해왔다. 이 땅의 여성들은 얼마나 더 ‘제도로서의 모성’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남성적 주체를 모방하는 데 급급한 ‘명예남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제도화된 어머니와 공모하면서 체험으로서의 어머니를 기억 속에서 지워갈 것인가? 타자를 도구화하지도, 지배하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관계, 타자를 위한 공간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는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 《메두사의 웃음》 중에 나오는 식수의 말로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너를 써라. 너의 몸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때에 잠재해 있던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날 것이다……. 여성은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였다. 욕망을 가졌다는 이유로, 욕망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감증이라는 이유로, 너무 들떠 있다는 이유로, 너무 모성적이라는 이유로, 모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여자들은 이제 자신의 억압을 토대로 구성되어온 역사 한가운데로 당당히 등장한다.
…… 침묵의 자리에서 벗어나 여성으로부터 여성을 향하여 글을 쓴다.

손들의 공동체 :윤석남의 나무 - 개들 - 김영옥
애타는 토템들의 힘찬 눈물 -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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