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살에 그림 시작해 거장 된 할머니…유기견 1000마리 조각한 이유는? [나를 그린 화가들] 매일경제 2024.11.18

정유정 기자 utoori@mk.co.kr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박완서 작가는 마흔에 소설 쓰기를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죠. 국내 화단에도 마흔의 나이에 붓을 든 화가가 있습니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입니다.

전업주부였던 윤 작가는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후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주제는 자신의 어머니에서, 자기 자신, 그리고 주변 여성으로까지 확장됐죠.

이후 윤 작가는 버려진 개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생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최근에는 역사 속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 그리기에 몰두했고요.

그림을 그린 지 40년이 넘은 지금도 윤 작가는 자기의 세계를 계속 넓히며 여성주의 미술에 천착하고 있습니다.

나이 마흔, 그림을 시작하다

윤 작가는 30대까지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였습니다. 집에서 아내이자 엄마였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합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무작정 그림 공부를 시작했죠.

윤 작가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 국내 화단은 추상 미술이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윤 작가는 추상 미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추상화에서 느껴지는 공허한 분위기가 싫었고, 추상 미술이 자신의 삶과도 직접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명성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 작가가 선택한 주제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윤 작가의 어머니는 자주 모델을 서줬습니다. 윤 작가의 어머니는 39세에 남편을 잃고 여섯 아이를 억척스럽게 키운 분이었습니다.

윤석남, ‘손이 열이라도’, 1985, ⓒ윤석남
윤석남, ‘손이 열이라도’, 1985, ⓒ윤석남

‘손이 열이라도’라는 제목처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여인이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며 행상을 하는 모습입니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또 다른 아이에게 젖을 먹입니다. 광주리를 머리에 인 채 주걱을 들고 있죠. 널브러진 가계부 옆에 있는 돈을 세기도 합니다.

그런 여인에게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눈물을 닦을 여유는 없습니다. 윤 작가는 여성의 바쁘고 고된 모습을 생생한 필치로 재치 있게 보여줬습니다.

윤 작가는 1982년 첫 개인전을 열고 이듬해 여성 미술가들의 모임인 ‘시월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당시 미술계는 시월 모임 작가들이 기혼 여성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춰 이들을 ‘주부 화가’, ‘규수 작가’라고만 불렀죠.

‘손이 열이라도’는 1986년 국내 최초의 페미니즘 미술전 ‘반에서 하나로’에서 전시되며 주목받았습니다. 또 이 전시 이후 여성주의 미술은 국내 화단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버려진 나무로 재현한 어머니

윤 작가는 1990년대에 버려진 나무를 사용해 어머니를 주제로 한 설치 미술에 집중했습니다. 윤 작가는 부드럽고 쭈글쭈글한 나무의 결이 늙은 여자의 피부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작업을 통해 예술이 고상하다는 생각을 깨고 싶었습니다. 윤 작가는 “사실 삶은 천박하지 고상하지 않다”며 “비천한 것들을 그대로 갖다 써서 현재 우리 인간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죠.

윤석남, ‘어머니I-열아홉살’, 1993, ⓒ윤석남
윤석남, ‘어머니I-열아홉살’, 1993, ⓒ윤석남

윤 작가가 어머니의 19세 시절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젊고 순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휘날리는 한복 치마는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생동감을 줍니다.

윤석남, ‘어머니III - 요조숙녀’, 1993, ⓒ윤석남
윤석남, ‘어머니III – 요조숙녀’, 1993, ⓒ윤석남

이 작품 속 여인은 앞의 ‘어머니I – 열아홉살’ 속 여인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얌전하고 정숙한 전통적인 여인상을 하고 있습니다. 표정은 굳어 있습니다.

윤석남, ‘족보’, 1993, ⓒ윤석남
윤석남, ‘족보’, 1993, ⓒ윤석남

‘족보’는 한자로 된 족보 이미지 배경에 나무로 두 여인을 만들어 설치한 작품입니다.

아들을 낳은 여성은 가운데에 당당하게 앉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한 오른쪽 여인은 스스로 목을 매달았습니다.

아들이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관습에 따라 두 여인의 운명이 엇갈린 셈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족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합니다.

윤석남, ‘어머니 이야기’, 1995, ⓒ윤석남
윤석남, ‘어머니 이야기’, 1995, ⓒ윤석남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에서 전시한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윤 작가는 어머니 그림을 두고 그 앞에 수십 개의 초를 켰습니다. 어머니를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화려하지만 불안한 공간, 핑크 룸

어머니 이야기를 한 윤 작가는 ‘핑크 룸’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핑크 룸은 가정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윤석남, ‘부엌’, 1999, ⓒ윤석남
윤석남, ‘부엌’, 1999, ⓒ윤석남

1990년대 말 유행하던 서양식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핫핑크색 공단이 씌워진 의자에는 뾰족한 갈고리가 달려 있어 앉기 어려워 보입니다. 의자 다리에도 쇠갈고리가 달려 있어 매우 불안정해 보입니다.

부엌은 보통 주부들의 공간으로 여겨지죠. 윤 작가는 식탁의 의자가 과연 여성들의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화면을 지배하는 강렬한 핑크색은 편안하기보다는 불안해 보입니다.

윤석남, ‘핑크 룸 IV’, 1995, ⓒ윤석남
윤석남, ‘핑크 룸 IV’, 1995, ⓒ윤석남

‘핑크 룸 IV’도 전반적으로 강한 핑크색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분홍색 구슬이 바닥에 가득 깔려 있고요. 소파 위에는 갈고리가 있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집니다.

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화려하고 근사해 보이지만, 그녀가 있을 곳은 없다”며 “구슬을 깔아두어 그 위에 설 수 없이 넘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한 현실, 그 현실 모순을 핑크 룸으로 형상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역사 속 여성

윤석남, ‘허난설헌’, 2005, ⓒ윤석남
윤석남, ‘허난설헌’, 2005, ⓒ윤석남

윤석남은 허난설헌, 이매창 등 역사 속 여성들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서구권의 1세대 페미니즘 미술가들이 잊힌 역사 속 여성 인물을 발굴한 작업과 유사합니다.

윤석남, ‘이매창’, 2005, ⓒ윤석남
윤석남, ‘이매창’, 2005, ⓒ윤석남

다만 조선의 여성을 발굴하고, 때때로 동양화 붓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윤 작가의 작업은 한국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윤석남, ‘빛의 파종’, 1997, ⓒ윤석남
윤석남, ‘빛의 파종’, 1997, ⓒ윤석남

윤 작가는 여성 모습을 한 나무 조각 999개를 만들었습니다. 보통 조각은 거대한 기념비의 형태로 세워지는데, 이 작품은 마치 씨앗을 심듯이 낮게 설치됐죠. 이름 없이 살다 간 역사 속 여성의 삶을 기리는 작업입니다.

윤석남, ‘빛의 파종’(부분), 1997, ⓒ윤석남
윤석남, ‘빛의 파종’(부분), 1997, ⓒ윤석남

모성,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다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윤 작가는 이후 관심사를 유기견으로 확장합니다.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의 사연을 신문에서 우연히 접하면서부터죠.

여기에 영감을 받은 윤 작가는 1025개의 유기견 나무 조각을 제작합니다. 이 작품은 1025마리가 모여서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죠.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작품 속 개의 눈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해 보입니다. 어떤 개들의 가슴에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개들이 겪은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작품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냉혹함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윤석남

윤 작가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넘어 자연과 생태계로 확장하는 모성을 다뤘습니다.

그는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다른 생물을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여성이 짊어져 온 행위이고, 여성 고유의 힘을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죠. 또 “제 자식만 아는 사람들이 싫다”며 “그건 모성이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다 보니 주변까지 아우르는 것, 자신의 사랑을 사회로 확장하는 것을 진정한 모성으로 여긴 셈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리다

윤석남, ‘김마리아 초상’, 2020, ⓒ윤석남
윤석남, ‘김마리아 초상’, 2020, ⓒ윤석남

윤 작가는 또 자신의 세계를 넓힙니다. 그는 여든이 넘어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윤 작가는 조선시대 초상화를 공부했는데요. 수백 년 동안 그려진 초상화 중 여성 초상화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여자들이 이렇게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일제에 대항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그리기로 한 거죠.

윤석남, ‘김옥련 초상’, 2020, ⓒ윤석남
윤석남, ‘김옥련 초상’, 2020, ⓒ윤석남

그의 작업은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소환하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현재 윤 작가가 초상화로 공개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76명에 달합니다.

윤석남, ‘권기옥 초상’, 2020, ⓒ윤석남
윤석남, ‘권기옥 초상’, 2020, ⓒ윤석남

윤석남의 자화상

윤석남, ‘자화상’, 2018 , ⓒ윤석남
윤석남, ‘자화상’, 2018 , ⓒ윤석남

윤 작가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조선시대 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영감을 받은 윤 작가는 2000년대 들어 한국화를 배웠습니다. 이후 민화 기법을 활용한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작가가 한지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짧고 곱슬거리는 파마 머리는 제멋대로 뻗쳐있네요. 굳게 다문 입술은 고집 있어 보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윤 작가는 자화상을 통해 실제 모습보다 자신을 더 꼬장꼬장한 할머니처럼 표현했습니다. 이 고집스러운 면모로 그가 40년 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요.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윤석남, ‘자화상’, 2018, ⓒ윤석남

작품 세계가 함축된 드로잉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윤석남-심장’ 전에서 그림 일기와 같은 그의 드로잉이 전시됐습니다. 윤 작가는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글도 함께 담았습니다.

이 작품도 당시 전시된 드로잉입니다.

윤석남,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2001, ⓒ윤석남
윤석남,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2001, ⓒ윤석남

‘너무 가볍다. / 너무 가벼워서 / 깃털보다 가벼워서 / 답싹 안아 올렸더니 / 난데없이 / 무거운 눈물 한방울 / 투두둑 떨어졌다. / 그걸 본 울 엄마 / “얘야, 에미야. 우지 마라 / 그 많던 걱정, 근심 / 다 내려놔서 그렇니라” / 하신다. / 어머니’

그림 속 늙은 엄마는 아기처럼 딸에게 안겨 있습니다. 그런 딸은 엄마를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당시 중년의 관객들이 이 드로잉을 찬찬히 보며 오랜 시간 그 앞을 떠나지 못한 게 기억납니다.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 아닐까요?

윤석남, ‘꼬부라진 등에도 쓰임새가 있다. 공생’, 2003, ⓒ윤석남
윤석남, ‘꼬부라진 등에도 쓰임새가 있다. 공생’, 2003, ⓒ윤석남

이 그림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꼬부라진 등에도 쓰임새가 있다. 공생’.

지팡이를 짚고 걷는 꼬부랑 할머니의 등에 나비와 새, 무당벌레와 달팽이, 개미 등이 올라와 있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윤석남, ‘전해오는 속담에’, 2001, ⓒ윤석남
윤석남, ‘전해오는 속담에’, 2001, ⓒ윤석남

할머니가 밤톨 머리의 손자를 꼭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손주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아가야! 천금같은 내 아가야 / 널랑은 명심해라 / 네가 커서 키 크걸랑 키 작은 이 대신해서 / 시렁 위에 얹힌 단지 두말 않고 내려주고 / 네가 커서 힘 있걸랑 힘 자랑 하지 말고 / 힘 없는 이 원커들랑 두말 말고 도와주고’

‘골목대장 되거들랑 동네대장 되지 말고 / 동네대장 되거들랑 나라대장 되지 말고 / 나라대장 되거들랑 세계대장 되지 말고 / 세계대장 되거들랑 자리 얼른 내어놓고 / 집으로 돌아와서 밭이나 갈려므나’

윤 작가의 드로잉에는 그가 평생 걸쳐 그린 작품 세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 자연과 생태계로 확장되는 모성, 평화로운 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이 드러나죠.

윤석남, ‘자화상’, 2017, ⓒ윤석남
윤석남, ‘자화상’, 2017, ⓒ윤석남

윤 작가는 평생에 걸쳐 부단히 사유하고 이를 예술로 옮겼습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 여성주의 미술은 생명에 대한 포옹으로 확장됐습니다.

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평생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싶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여성의 힘을 이야기할까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윤 작가의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참고 문헌>

-윤석남·김이경(2021),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한겨레출판

-윤석남·한경옥(2016),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 사계절

-윤석남(2013), 윤석남 = Yun, Suknam, 헥사곤

-김현주 외(2008), 핑크 룸 푸른 얼굴 : 윤석남의 미술 세계, 현실문화연구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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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보기: https://www.mk.co.kr/news/culture/11169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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