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광복기획 1편] 기억되지 못한 절반의 역사, 여성들의 독립운동기획취재 – EBS

송성환 기자 | 2025. 08. 12

[EBS 뉴스12]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80년이 되는, 광복 80주년입니다.

광복을 향한 길에서 남녀 모두가 싸웠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여성은 전체의 3%에 불과한데요.

EBS뉴스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기억에서 누락된 절반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송성환 기자입니다. 

[리포트]

인터뷰: 윤석남 / 작가

“한 인간으로서 완벽한 대접도 받지 못한 이 사회를 위해서 당신들의 목숨을 내던졌다는 거죠. 저는 처음에는 그게 굉장히 의아스러웠어요.”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을 그리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작업.

화폭에 담긴 인물이 어느덧 백 명을 훌쩍 넘었지만, 여든여섯 작가는 아직도 붓을 놓지 못합니다.

인터뷰: 윤석남 / 작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나라라는 거는 그냥 나라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내가 보호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분들을 내가 그림을 그리자 이분들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나는 작업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계속해서.

손톱만 한 사진 한 장에 의지해 백 년 전의 얼굴을 복원하고, 그것마저 없을 때는 상상력으로 여백을 채웠습니다.

백 가지 모습으로 저마다의 사연과 의지가 재현됐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형형한 눈빛은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인터뷰: 윤석남 / 작가

“여성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보면서 보면은 아주 그 눈빛에서 강한 그런 열정 같은 게 보여요.  그래서 제 그림에는 그렇게 강한 눈빛이 많이 표현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 유독 울분에 찬 듯 굳게 입을 닫은 채 정면을 응시하는 한 여성.

단재 신채호의 유해가 담긴 단지를 들고 있는 아내 박자혜의 초상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동료 간호사들과 간우회를 조직해 거리로 나섰고, 이듬해 신채호와의 결혼 뒤엔 3년 만에 남편 없는 서울로 홀로 돌아와 가장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가난, 기나긴 옥바라지의 세월.

그러나 박자혜의 항일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정민 /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자혜 선생은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의 큰 뜻을 받들어서 유지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부부이자 투쟁 동지였던 두 사람을 이어준 사람은,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 이은숙입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북경을 옮겨 다녀야 했던 이회영 일가의 불안한 삶 한가운데서, 가족의 살림과 교육은 온전히 이은숙의 몫이었습니다.

인터뷰: 서해성 / 이회영기념관 감독

“가족들을 책임지고 동시에 자금도 책임지고 그러면 또 동시에 독립 투쟁을 전개했던 그런 분이기 때문에 이은숙 선생이 없었으면 이회영 선생님의 독립운동이 가능했을까….”

이회영 일가의 치열했던 삶과 고단한 발자취는, 해방 후 이은숙이 집필한 수필 『서간도시종기』에 오롯이 담겼습니다.

한글로 기록된 이 수필은 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물론, 일제의 언어 정책을 피해 지켜낸 우리말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인터뷰: 서해성 / 이회영기념관 감독

“이분(이은숙)은 일제 강점기 교육을 안 받으셨어요 그러니까 이른바 흔히 말하는 서울 양반이 쓰는 말투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일본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말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면 서간도시종기를 찾을 수 있겠다.”

이런 업적에도 이은숙이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은 것은 2018년.

남편 이회영과 아들 이규창이 1960년대 이미 유공자가 된 것에 비하면 반세기나 늦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되짚겠다면서 최소 옥고 3개월 이상 조건을 폐지하고, 일기와 회고록을 기록으로 인정하는 등 서훈 기준을 고친 덕분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아내 단양 이씨, 만주 항일무장단체 서로군정서 살림을 책임진 허은,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근화여학교 학생 21명 등도 서훈 기준이 바뀌고서야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문재인 / 前 대통령 / (2018년 호국보훈의 달 기념식)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 낼 것입니다.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습니다.”

2017년까지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고작 2%.

하지만 서훈 기준 개정 이후 해마다 신규 포상자 중 여성 비율은 10%를 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1만 8천여 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전히 여성은 6백60여 명, 3.6%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이준식 / 前 독립기념관장 / 지청천‧윤용자의 외손자

“저희 외할머니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남편을 따라서 뒤늦게 만주로 가셨거든요. 저희 외할아버지가 계속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집안을 지켜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거든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묵묵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독립운동가의 아내, 어머니는 훨씬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런 분들을 다시 평가해야 된다는 거죠.”

1919년 만세운동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장투쟁까지 35년 항일의 시간마다 존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

누군가의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역사에서 지워진 이들에게 마땅한 이름과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광복 80주년을 맞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EBS뉴스 송성환입니다.

출처: https://news.ebs.co.kr/ebsnews/menu3/newsFocusView/60631196/H?brdcDt=&cPage=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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