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 윤석남의 ‘1,025 : 사람과 사람없이’, 경기일보, 2016.2.18

‘빛의 존재’로 환생한 유기견들

2008년 아르코미술관에 1,025마리의 나무 개가 섰지요. 마치 그것은 헤럴드경제의 이영란 기자가 표현했듯이 ‘유기견 진혼제’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선생께서는 버려지거나 길 잃은 개들을 데려와 키운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죠. 

그 해 이른 봄에 경기도미술관 기획의 ‘언니가 돌아왔다’ 전시를 위해 화성시 소재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선생은 개의 형상을 조각하고 그리는 일에 완전히 빠져 있었어요. 나무를 깎는 일이 노년의 작가에게는 힘든 일이어서 동생 분께서도 이 일을 돕고 있었죠.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저는 무언가 섬뜩했어요. 그 인상은 오래 남아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요. 왜냐고요? 입구 왼쪽으로 통나무의 외피 두껍게 잘라 낸 조각들이 길게 기대어 섰는데, 마치 그것들은 영혼을 가진 듯 살아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햇살과 비바람을 견뎠던 흔적들이 나무에 스며서 거무튀튀한 것도 예사롭지 않았고, 그 외피의 굴곡과 옹이와 추상의 이미지들이 그림자로 드러난 것도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무들이 전부 외피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직각의 밋밋한 나무는 하나도 없었어요. 모두 나름의 ‘얼굴’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게죠. 

버려진 개들과 땔감으로밖에는 사용되지 않는 나무들이 하나로 만나서 형상이 되고 그림이 되는 사건이 선생의 작업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그것을 한 눈에 알아 봤어요. 그러니까 선생의 작업실은 개와 나무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탄생하는 산파의 자궁이었던 것이죠.

아르코미술관의 전시가 실제의 이야기에 바탕한 1,025마리 개의 서사라면, 그 이후에 학고재에서 108마리의 ‘나무-개’를 전시한 것은 미학적 상징을 키우는 작업이었을 거예요.
주간한국의 윤선희 기자는 “존재를 박탈당한 개들이 환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할법한 화려한 꽃들, 혹은 촛불처럼 보이는 붉은 불꽃 등을 등에 달거나 곁에 두고 있다. 작가는 나무-개들에게 해탈을 위한 어떤 의례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 전시를 통해 그것을 실천했다.”고 말하더군요. 

꽃과 촛불, 붉은 불꽃에서 우리는 선생의 작업이 죽은 개들을, 떠돌던 개들을 ‘빛의 존재’로 환생시키려 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은 빛의 존재들이잖아요. 굳이 해탈이 아니더라도 살아서 행복한 삶을 사는 존재들은 모두 신명의 존재, 빛의 존재예요.

언젠가 저는 선생을 두고 “샤먼의 푸른 종소리”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어요. 선생의 작업은 지극히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깨달음이지만 뭇 생명에 대한 ‘온살림’의 태도로 확장되어 왔지요. 페미니즘 혹은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살필 수도 있겠으나, 저는 신을 내리고 올리는 샤먼의 행위가 먼저 떠 오르네요.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장

기사원문보기: 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129639

'모성 깃든 드로잉을 그림책에 담았다', 국민일보, 2016.2.18
'엄마, 나, 딸..우리를 위한 그림책', 경향신문, 20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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